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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테크노 뽕짝’ 신바람 이박사

[인간탐구] ‘테크노 뽕짝’ 신바람 이박사

“저 혼자만 좋으면 뭘 합니까. 다 좋아해야지. 상대는 멀뚱멀뚱 팔짱만 끼고 있는데 저 혼자만 떠들고 노래 불러야 되는 자리는 그래서 안 갑니다. 팬들도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렇게 다함께 한덩어리로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저는 좋습니다. 그렇게 노래하다 보면 사실 제가 제 흥에 먼저 취합니다.”

일명 ‘테크노 뽕짝’의 대가, 신바람 이박사(본명 이용석·46). 몸은 40대인데 추종자는 10대, 20대들이다. 딱 아들뻘 되는 나이들이다. 남자지만 남자 팬이 더 많다. 나를 알아달라고 아직 크게 떠들지도 않았는데 인터넷에선 절로 뭉친 팬클럽이 떼를 지었다.

전속 기획사보다 더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그를 홍보하는 것도 그들. 가히 폭발적인 인기다. 왜 그는 뽕짝세대 중, 장년도 아닌 피자세대에 엉뚱하게 강림했을까. N세대가 아니면 그것부터 수수께끼다.

알맹이만 보면 그의 노래란 것도 사실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그의 첫 음반이 나오던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노래가 그 노래다. 강원도 아리랑, 무너진 사랑탑, 한오백년 등 익히 귀에 박힌 트롯곡. 단지 달라진 건 포장이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강력한 테크노 리듬에다 ‘21세기형 뽕짝’답게 제목엔 이곳저곳 첨단냄새도 섞였다.

영화 ‘거짓말’의 삽입곡으로도 알려진 ‘나는 육체의 환타지’를 비롯해 ‘메가박사 닥터 E의 테크노 초체험’, ‘루팡3세 테마파트’, ‘춤추는 폼포코링’ 등 테크노 리듬으로 부르는 트롯 변주곡.

그중에도 백미는 독특한 추임새다. ‘미쵸미쵸’, ‘딩디리리링’, ‘우르리히히’ 기타등등. 라이브에 살고 라이브에 죽는 별난 뽕짝가수. 애드립에 살고 애드립에 죽는다. 화끈하고 즉흥적인 요즘 젊은이에겐 유치해서 오히려 매력적이다. N세대를 강타하고 있는 최근착 태풍의 눈, 신바람 이박사는 정말 신이 났다.


일본열도 뒤흔들고 한국에 상륙

“사실은 이미 일본에서 6년전 히트시킨 음악들입니다. 그땐 지금보다 더 열광이었죠. 일본 청소년에 비하면 우린 차라리 얌전한 편입니다. 지금도 국내 젊은이들이 테크노에 광란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겁니다.

옛날 일본 공연땐 어린 여학생까지 어찌나 적극적이고 야한지…. 말도 못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일본에서 뜰 때도 국내에 돌아와보면 저는 여전히 여기서 무명가수였습니다. 워낙 뽕짝에 냉담한 우리나라라 사실 큰 기대를 하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좀 의외이기도 합니다.”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은 이미 한차례 일본열도를 뒤집고 온, 한 박자 늦은 여진(勵振)이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그는 일본 무대에서 알아주는 한국인 가수였다.

테크노 뽕짝 하나로 쾌속부상, 후지 NHK 등 현지 방송사의 인기 가요프로그램, 토크쇼 등에 줄줄이 초대손님으로 불려가는가 하면 스타급만 쓰기로 소문난 한 살충제 광고에도 외국인 최초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이박사 캐릭터 인형을 가방에 걸고 다니는 일본 학생의 유행을 불러왔고 뒤따라 한국어 학원이 갑자기 성업을 이루었다든가 한국인과 결혼하는 일본인이 늘어났다는 소문도 함께 들린다.

지금까지 낸 음반은 국내 19개, 일본에서 제작한 6개다. 일본에서도 한국말 그대로 뽕짝을 불렀다. 누군가 그의 얼굴이 일본인 닮았다고 했을땐 그 소리가 듣기싫어 한국인이란 걸 더 떠들고 다녔다. 누가 묻기도 전에 노래 앞머리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신바람 이박삽니다”란 소리를 달고 다녔다.

일본 소니뮤직과의 3년 전속계약이 끝난 뒤 1년전 국내무대로 완전히 돌아왔다. 현재는 한국 소니뮤직과 계약을 맺은 상태. 주로 팬클럽 회원이 요청하는 공연에 나서거나 신곡준비를 하고 최근 들어 밀려드는 방송, 잡지 등의 인터뷰 요청만으로도 스케줄이 꽉 찬다. 수입은 비공개.

갑부나 가난뱅이나 요 하나 깔고 자긴 마찬가진데 돈에 매달려 노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단다. “천하의 재벌 이병철도 갈 땐 텔레비전 하나 못들고 가더라”는게 그가 돈을 보는 눈이다.


부친은 국악인, 모친도 경기민요 명수

무대에서든 집에서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어쩌다 마지못해 부르는 블루스 곡도 다 털어 세곡이나 될까말까. 직업정신이 투철해서만은 아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고생를 맛본 터라 행여 울적한 기억이라도 나지 않을까 스스로 내키지 않아서다.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서 출생. 수시로 해외공연을 다닐만큼 소리 잘하고 학식도 높았다는 국악인 아버지와 경기민요를 빼어나게 잘 불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3형제중 막내.

노래도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산에 고사리를 뜯으러 갈 때면 식사 뒤 막간에 정좌로 앉아 매섭게 노래를 가르친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 덕분에 3형제 모두 가수급이다. 특히 농사를 짓고 있는 59세의 큰 형님 앞에선 지금도 노래를 못한다. 진짜 가수가 됐었어야 할 형님 앞에 노래부르기가 오히려 낯 부끄럽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 취미에 없는 공부는 일찌감치 접었다. 초등학교 졸업후 한 스님 밑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게 전부다. 농사 외에도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다 해봤다.

아이스케키 장사, 요정의 ‘새끼 보이’, 양복점 보조, 이발소 보조, 다방 DJ, 우체부, 중국집 배달원, 다방 주방보조, 당구장 종업원. 서울에 올라온 뒤엔 청량리역 구두닦이, 양복점 재단사, 요정의 접대부 창(唱)지도, 그리고 직접 개업했다가 두 번이나 망한 뒤 세번째에 겨우 본전만 만회한 양복점 등등.


관광버스 가이드 시절 뽕짝 디스코 눈떠

서울살이를 시작한 건 1973년 KBS 민속백일장 예선통과후 본선에서 떨어진 뒤부터. 그 길로 아예 서울에 눌러앉았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 작곡가 임종수씨를 찾아가 악보 보는 법도 배우고 어깨너머로 가수공부를 했다.

1978년 “돈도 벌고 노래도 부르고 전국 유람도 즐길수 있다”는 소리에 혹해 관광버스 가이드가 됐다. 1년이 멀다 하고 직업을 갈아치우던 그가 자그마치 11년을 버텼으니 그땐 천직이라고 여겼다. 당시 관광버스업계에선 이씨가 유일한 남자 가이드였다. 그의 오늘이 있었던 바탕도 사실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엔 그저 괜찮은 가이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얘깃거리를 찾기 위해 ‘대망’, ‘삼국지’ 등 소설은 물론 최신 유머집도 샅샅이 탐독했고 관광안내서를 달달 외어 유창한 안내멘트로 손님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내용에 자신부터 질려버렸다. 막간 여흥을 위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불러주던 노래도 매양 똑같은 게 지겨웠다. 그래서 하나둘씩 슬쩍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반응이 좋았다. 점점 더많은 추임새가 필요했고 그러자면 더많은 연습이 있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그 노래를 완전히 꿰고 있어야만 내 맘대로 휘두를수 있는 것이 애드립. 틈만 나면 악보를 펴고 외다시피 전곡을 머리에 넣었다.

지금도 한번에 부를수 있는 노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백곡이든 한번도 끊지않고 부를 수 있다는 그다. 관광버스 11년 실전으로 닦은 솜씨다.

“하지만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새벽 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일어나 다시 버스를 타야되니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의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일하곤 했어요. 또 손님들 오만가지 비위 다 맞춰드려야지, 잔심부름해야지, 노래 불러야지, 지금도 그 일 다시 해보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어요.”

그의 노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한 음반사의 제의로 1989년 난생 첫 음반도 취입했다. 특유의 애드립을 발휘한 뽕짝 디스코 메들리. 3개월만에 테입 40만개가 팔리는 히트를 기록했다. 1989년 가이드 생활을 청산하고 정식가수로 나섰다.

오아시스 레코드사와 전속계약, 초창기엔 고배도 마셨다. 1집은 자신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은 점잖은 트롯을 부른 것이 소화불량. 2집은 KBS의 심의에서 ‘가사 저급’으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으면서 홍보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가사는 ‘그것도 모르냐. 나이가 몇인데….’로 시작되는 노래.


"테크노 후속 대안도 이미 생각해뒀어요"

밤무대 무명가수의 설움도 톡톡히 겪었다. 자신은 온몸으로 열창해도 시종 박수에 인색하던 손님이 인기연예인만 나왔다하면 대충 부르고 가는 노래 한곡에도 환호가 쏟아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 언젠가는 인정을 받고 말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여기까지가 일본에 가기 전의 얘기다.

1996년 ‘독특한 한국 가수’를 찾던 일본 음반기획사의 눈에 띄어 일본 활동이 시작됐다. 대박은 거기서 터졌다. 한국에서 왔다는, 키 160cm 몸무게 45kg의 신바람 이박사는 튀는 노래재주 하나로 거인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국내로 복귀, 이젠 국내에서도 이목을 끌고 있으니 웬만큼 소원도 풀지 않았을까.

“이만하면 누릴 것 다 누려본 것 아니냐구요? 아뇨. 정말 제가 원하는 건 영원한 뽕짝입니다. 유행이란 잠시 반짝거릴뿐 제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하면 우리 뽕짝을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게 할까,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합니다. 테크노 다음 대안도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개는 못하지만 다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7년전에 재혼, 현재 2남1녀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이박사. 22세의 장남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노래실력이 수준급이다.

얼마전엔 자신도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에게 ‘연예인이 되면 각오해야 할 어려움 열 가지’를 열거, 두말없이 자진포기시킨 아버지. 그렇듯 아들의 고생길은 두손 들고 말린 그지만 정작 자신의 길엔 다른 선택이 없다. 오직 이 일방통행로 하나뿐이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저는 노래하며 살겁니다. 다만 그때는 공부를 좀 더 한 다음에 노래할 겁니다. 살아보니 뭐라도 더 배우고 더 공부하는 게 여러모로 좋겠더라구요. 보고 배우고 느끼는 모든 것이 결국엔 노래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거든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0/08/0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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