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23)] 신동주 한아시스템 사장(下)


조직 재정비 '시스코에 도전장'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창업이후 신동주 사장의 하루하루가 그랬다. 남의 밑에서 기술을 개발할 때와는 달리 한 사업체의 사장으로 다른 기업의 기술용역을 맡아 기술을 개발하게 되자 뜻밖에도 좋은 일만 뒤를 이었다.

“1993년 본격적으로 자체 네트워크 장비를 개발하기 전에는 기술개발을 대행했는데, A기업의 주문을 6개월짜리로 받아와서는 2개월만에 후다닥 해치우곤 B사에서 또다른 일감을 받아왔지요. A사 기술은 4개월만에 납품합니다.

A사측에서는 기술개발을 2개월 가량 앞당긴 셈이니 ‘기술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수 밖에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6개월치에 해당하는 용역비를 두서너 개 회사에서 받아 챙긴 겁니다.”

그것은 뛰어난 기술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다.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결과였다. 당초 예상보다 돈이 빨리 모였다. 신사장은 창업 1년여만에 경기도 오산에 있는 공장 하나를 인수했다. 웬만한 벤처기업이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기술력도 인정받고 돈도 버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보람도 느꼈다.

“원래 삼우통신공업에 있을 때 장비 국산화를 주장하다가 외국 기술의 도입을 원하는 경영진과 사이가 틀어졌어요. 그만 두고 퓨쳐시스템으로 옮겨갔는데 또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참 사업들 못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답답한 생각에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IMF로 한때 도산위기

누구라도 그 정도 실력이라면 기고만장할 때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너무 사업을 못해서 뛰어들었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을 할 노릇이지만, 기술력은 기술력대로 인정받고 돈은 돈대로 잘 버니 그 콧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업이란게 항상 순풍에 돛단듯 할 수는 없었다. ‘사업이란 한번 삐끗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를 신 사장은 피를 말리는 IMF위기 시절에 절실히 깨달았다.

1997년 11월에 시작된 IMF체제는 한아시스템을 도산위기로 몰고 갔다. 무작정 은행과 개인투자자를 만나 한아시스템의 미래가치를 맨투맨식으로 설득했다. 기술력이 바로 담보였다. 신 사장은 지금도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때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아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외제를 선호하는 업계 풍토였어요.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국산이라면 왠지 꺼려했죠.”

그것은 당연했다. 처음으로 국산화한 제품이니 누가 선뜻 믿어주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면 IMF위기는 한아시스템에 위기와 동시에 기회를 안겨주었다. IMF위기로 자금이 쪼달리던 유저(사용자)들이 값싼 국산장비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아시스템이 1998년에 개발한 소형 라우터의 경우, 라우터의 대명사인 ‘시스코’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인식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시스코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소형 라우터 시장을 장악하면서 인터넷 장비분야에서 자리를 굳혔다”는 신 사장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규모에 맞게 조직을 재정비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끈끈한 인간애에다 시장경제의 효율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그는 “벤처의 창의성을 잃지 않으면서 중견기업의 시스템을 만드는 게 목표”라면서 “그것은 모든 정보를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협력하는 조직력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창업 이후 신동주 사장이 내건 ‘한 식구론’은 처음부터 특이한 기업문화를 만들어냈다. 한아시스템 직원들은 1994년부터 스키장에서 회의도 하고 함께 스키를 즐긴다. 사장과 직원이 함께 어울리는 술자리도 많다. 창립 초기에는 한아시스템 직원이면 누구나 가서 마시고 싸인만 하면 되는 호프집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고 업무기능이 추가되면서 빈약한 인적 네트워크가 문제점으로 부각됐다. 한국적 정서에 마냥 호소하기엔 효율면에서 너무 손실이 많았던 것. 언제까지나 ‘구멍가게’식으로 운영할 수는 없었다.

신 사장이 이 문제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곧 드러났다. 그는 ‘스타 만들기의 한계’를 첫 화제로 꺼냈다. 나름대로 회사내에서 ‘스타’를 만들어주었더니 제 잘난 줄만 알고 팀워크의 중요성을 무시하더라는 것.

그가 조직 재정비에 매달리는 것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1~2년 뒤에 무릎을 치며 아쉬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되돌아봐도 아쉬운 게 두어가지 있어요. 잘 나갈 때 IMF위기를 대비하지 않아 엄청나게 곤란을 겪은 것이 첫째고, 두번째는 2~3년 전에 소형 라이터 기술을 기반으로 중대형으로까지 진출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시작했더라면 시스코가 문제가 아니죠.”


한국적 의리에 바탕둔 개혁 추진

그가 예를 든 시스코는 1984년에 설립됐으나 인터넷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전에 인터넷 접속장비를 개발해 세계 최고기업으로 올라서는 기틀을 닦았다. 그만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지금도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인력채용, 기술지원 등 다방면에서 온라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E-커머스 시스템을 구축, 앞서나가고 있다고 한다.

신 사장의 시스코 따라잡기 전략은 ‘투플러스투’(2+2)다. 지난 4월 회장으로 영입한 박영환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조직관리와 대 정부관계를, 신 사장은 연구개발, 사업제휴 및 기술관련 마케팅 등을 맡아 2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사업을 정보통신과 산업전자 분야로 나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현재 개발을 완료한 Ethernet, Fast Ethernet 장비 외에도 ISDN 장비, xDSL 장비, RAS 장비 등 다양한 인터넷 장비를 개발하고 있고, 산업전자 분야에서는 제어 보드 분야에서 확보한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VMEbus 제품을 개발했다.

앞으로는 중대형 라우터 및 기가비트 스위치 개발과 무선 및 위성인터넷 접촉장치 상용화 등을 통해 보다 편하고 빠른 네트워크 통합솔루선을 제공할 계획이다. 수출도 조만간 전체 매출의 70% 이상으로 끌어올릴 작정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신 사장은 인터넷 장비업계의 골리앗인 시스코를 제압할 비책을 마련한 듯한 표정이다. 그것은 한국적 의리를 바탕에 깐 조직재정비다. 이를 위해 핵심인력 4인방을 방출하는 아픔을 겪었던 신 사장. 그는 고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08/0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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