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물꼬', 아직 '산 넘어 산'

한미 SOFA협상, 한국측 요구 '일부 수용'

“미국은 움직이기 힘든 나라입니다.” 지난 7월3일 오후 이틀 동안의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을 막 끝낸 한국측 수석대표 송민순 외교통상부 북미국장은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의 소회를 이렇게 내비쳤다.

그의 언급은‘움직이지 않는 나라’ 미국을 상대로 우리의 SOFA 개정 요구를 관철시키기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 SOFA 개정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던 미국이 비로소 움직였다. 2, 3일 서울에서 열린 협상은 SOFA의 대표적 불평등 조항으로 꼽혀온 미군 피의자의 신병 인도시기 문제를 해결할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송민순 국장과 미국측 수석대표 프레데릭 스미스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는 협상후 공동발표문을 통해 “미군 피의자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면서 신병을 기소시점에 인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법적 권리보장’이란 단서가 붙긴 했지만 미국이 좀처럼 양보할 것 같지 않던 ‘기소시점 인도’를 수용한 것은 미국의 고집이 한풀 꺾였음을 의미한다.


미군피의자 '기소시점 인도'

그동안 한미 SOFA의 개정 필요성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한마디로 ‘노(No)’였다. “잘 운영되고 있는데 왜 논쟁의 대상이 되느냐”는 반문이 우리측의 개정 요구에 대한 대답이었다.

로버트 마운츠 미 SOFA 사무국 간사와 전 주한미군 법무참모 울드릭 휘오리 대령은 SOFA 개정요구를 반박하기 위해 작성한 ‘SOFA는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가’라는 문건에서 “한미 SOFA는 1966년 이후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현대적 SOFA’에 필적하는 수준이며 한국에 유리한 조항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또 “한미 SOFA가 1960년, 1963년 발효한 미일 SOFA, 독일보충협정을 모델로, 80여차례의 공식협상 끝에 완성된 ‘선진(先進) SOFA’인데 무엇이 불평등하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문 속엔 쉽게 개정협상에 응할 수 없는 미국의 고민이 감춰져 있다. 이들은 85개국과 SOFA 협정을 맺고 있는 미국이 어느 특정 국가의 SOFA 규정을 수정할 경우 다른 나라에 연쇄반응(Chain Reaction)을 가져온다는 점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우리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당신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데 우리가 원하는 만큼 신변보장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대국적 오만함까지 보태져 SOFA 개정요구에 대한 마지노선을 형성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국을 마지노선 밖으로 나오게 했는가. 지금까지의 SOFA 개정사를 뒤돌아 보면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나오도록 한 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SOFA 조항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미군 자신이었다.

윤락녀 살해, 강도, 강간 등 강력범죄와 폐수방류 등 환경 오염사고. 미군 범죄에 대해 한국민의 비난이 들끓고 악화된 여론이 반미감정으로 번질 때 미국은 마지못해 협상 테이블로 걸어나오곤 했다. 1991년 SOFA 1차개정 협상 때가 그랬고 1995년 5월 미군의 충무로 지하철 시민집단 폭행사건으로 농축된 시민의 공분이 그해 11월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협상 테이블로 불러낸 '반미감정'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향리 사건과 미군의 독극물 한강 방류사건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번 협상에 적극성을 띠도록 한 촉진제였다. 이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미국이 과연 이번처럼 유연한 태도를 보였을까. 우리 협상 대표들 조차 여기에 회의를 표시한다.

미측은 이번에 1995년~1996년 협상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한 협상관계자는 미군 피의자 기소시점 인도 요구에 대해 미측이 방패막이로 내세웠던 재판관할권 축소 주장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측은 협상 직전 우리측에 전달한 개정시안에서 “미군 피의자를 기소때 넘겨주되 모든 미군 범죄에 대해 일차적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국 정부의 권한은 단기 3년 이상의 징역형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제외하고는 한국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하지 말라는 요구다. 게다가 미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의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피의자의 재인도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우리의 사법주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한 협상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측이 이번 협상에서 이같은 주장을 기소시점 신병인도의 조건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커진 셈이다.

또 환경 분야를 비롯 미군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의 노동조건, 동·식물 검염, 시설·구역의 공여 및 반환, 주한미군 비세출자금기관(PX 등)에 대한 한국인 출입제한 등 분야에 대해서도 협상 대상이 안된다는 완강한 태도에서 계속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향후 협상의 가능성을 넓혀주었다.


선언적 의미에 그칠 수도

하지만 미측의 이런 태도가 우리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법적 권리보장’의 구체적 조건에 대해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미군 사령관의 신병 재인도 요청의 경우 우리 법체계상 무리한 요구라는 점을 미측이 어느 정도 납득하고 돌아갔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지만 완전히 철회한 것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시비거리로 재론할 가능성이 있다.

또 “환경 등 다른 분야는 계속 논의할 수 있다”는 합의는 선언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1996년의 경우처럼 언제든지 ‘논의중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이 조기에 매듭지어질 지도 의문이다. 미국 사정에 정통한 외교부 간부는 적어도 2년내 타결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무엇보다 향후 협상이 집중적으로 이뤄질 시점이 미국의 대선 기간과 겹친다는 사실은 협상의 조기 타결을 어둡게 하고 있다. 미국이 본격적 대선 국면에 돌입하면 클린턴 정부의 행정력에 공백이 생길 것이고 행정공백은 곧 미국의 최종 입장에 대한 결정이 미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 대선에서 조시 부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돼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타결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새 정권이 다른 80여개국에 영향을 미칠 한미 SOFA 개정에 쉽게 동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우리측은 이런 사정을 감안, SOFA 협상을 가급적 조기에 매듭짓는다는 입장이지만 미측이 협상은 하되 타결은 늦추는 지연책을 구사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러한 애매한 상황으로 인해 시민단체로부터 “알맹이없는 협상 결과”, “미국의 생색내기에 불과한 내용이 전부”라는 비난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국민의 요구사항은 많은데 미국이 움직인 발을 다시 뒤로 뺄 가능성은 열려 있고….” 협상 관계자들의 고민은 향후 SOFA 협상의 험난한 진로를 예고하고 있다.

김승일 정치부 차장

입력시간 2000/08/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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