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아시아 최초 8,000㎙ 14좌 완등

그에겐 아직 오를 곳이 남아 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높이는 8,848㎙. 1953년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섰을 때 세계 산악계는 “이제 높이에 대한 추구는 끝났다”고 입을 모았다.

세계 산악계의 이같은 반응에는 동전의 양면같은 두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선 에베레스트 선착경쟁에서 한발 뒤진 쟁쟁한 산악인들의 실망감이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 초반 히말라야는 산악 선진국들의 국력 경쟁장이나 마찬가지였다. 8,000㎙급 거봉들을 놓고 산악인들이 국가적 지원과 관심속에 치열한 선등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 하나는 높이 외에도 추구해야 할 과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산악인들의 자기위안이었다. 높이 외에 남아있는 건 무엇일까. 그건 ‘보다 어렵게’였다.

‘보다 어려운 방법으로, 보다 어려운 루트로 오르려는’ 산악인들의 도전정신은 아직까지 알피니즘의 정수로 남아 있다. 미답봉을 선배에게 빼앗겨버린 후배 산악인은 선배가 먼저 올랐던 산을 더 어렵게 오름으로써 스스로의 행위를 위안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한계 뛰어넘는 '예술'

8,000㎙ 이상의 산을 한사람이 모두 오르는 것은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전개된 새로운 알피니즘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해발 8,000㎙가 넘는 산은 ‘자이언트’로 불린다. 산중의 산, 산의 거인이란 의미다.

지구상에서 자이언트는 모두 14좌. 8,000㎙의 위와 아래는 말그대로 천양지차다. 8,000㎙ 고도를 통과하는 행위는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한다는 것이 일류 산악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따라서 자이언트 14좌를 모두 오른다는 것은 분명 인간이 대자연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극한적으로 끌어내는 행위예술임에 틀림없다.

한국시간 7월31일 오전 10시15분, K2 정상(8,611㎙)으로부터 엄홍길(40)씨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베이스 캠프로 전해졌다.

“여기는 정상. 이제는 더 오를 곳이 없다.” 고소 셰르파 1명과 함께 8,000㎙ 지점에 설치된 제4 공격캠프를 출발한 지 6시간만에 그는 표고차 611㎙를 극복하고 정상에 섰다. 엄씨가 ‘더 오를 곳이 없다’고 말한 건 이번으로 14번째. 마침내 그가 자이언트 14좌를 모두 해치웠다.

엄씨의 첫 자이언트 등정 성공은 1988년 에베레스트. 이번에 K2까지 14좌를 모두 오르는데 12년이 걸렸다. 평균 6개월에 하나씩 오른 셈이다. 그가 처음으로 해외원정길에 올랐던 것은 1985년. 목표는 에베레스트였다.

하지만 7,500㎙에서 돌아서야 했다. 이듬해에는 8,500㎙에서 또다시 후퇴했다. 두번의 실패를 딛고 88년에야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지금까지 엄씨가 자이언트에 도전한 횟수는 28번으로 성공률은 꼭 절반. 이 과정에서 그는 동료 7명을 설산에 묻어야 했다.

지금까지 자이언트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은 엄씨를 포함해 모두 7명이다. 철인이자 명상가로 통하는 라인홀트 메스너(오스트리아)가 1986년 테이프를 끊었다.

이어 예지 쿠크츠카(폴란드·1987), 에라르 로레탕(스위스·1995), 카를로스 카르솔리오(멕시코·1996), 크시슈토프 비엘레츠키(폴란드·1996), 후아니토 오아라사발(스페인·1996)이 차례로 철인의 반열에 올랐다. 아시아인으로서 14좌를 모두 오른 사람은 엄씨가 최초다.


보통사람이 두배에 가까운 폐활량

엄씨가 14좌를 완등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탱크’로 불릴만큼 강인했던 체력과 정신력, 훈련 덕분이었다. 고교졸업 후 본격적으로 산생활을 시작한 그는 보통사람의 두배에 가까운 폐활량을 갖고 있었다.

군복무는 해군 수중폭파대(UDT)를 지원해 강인한 체력을 쌓았고, 그만큼 평범한 생활을 싫어했다. 그는 연습벌레였다. 오전에 서울 도봉산을 찾는 사람이면 운동복 차림으로 산악구보를 하는 엄씨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엄씨를 철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가장 큰 힘은 정신력이었다.

엄홍길, 그는 이제 어디를 오를 것인가. 자이언트 14좌 완등의 목표가 사라져 버린 지금, 그는 이제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할까. 이 과제는 올해안에 철인의 반열에 새롭게 들 것으로 보이는 박영석씨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박씨는 현재까지 자이언트 13좌를 등정했다. 역시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보다 어렵게’일지도 모른다. ‘보다 어렵게’에는 알파인 스타일의 단독등반, 무산소 등반, 장비의 최소화, 보다 난코스를 통한 등반 등이 포함된다.

히말라야 등반방식은 극지법(極地法)과 알파인 스타일로 나뉜다. 극지법은 남·북극 탐험방식을 원용한 것.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까지 군데군데 공격캠프를 설치해 식량과 장비를 옮기고, 고소에 신체를 적응시키면서 서서히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번에 엄씨의 등반방식도 공격캠프를 4개나 설치한 극지법이었다. 이에 반해 알파인 스타일은 셰르파없이 등반대원 1~3명이 베이스 캠프를 출발해 정상까지 바로 공격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14좌를 처음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절반정도를 이 방식으로 했다. 보다 어려운 알파인 스타일은 앞으로 산악인의 계속적인 과제로 남을 것이다.


한국등정사 23년만의 쾌거

‘보다 난코스’를 택하는 것은 등반의 질과 관계있다. 7,000~8,000㎙대에서 빙벽·암벽 혼합등반을 해야하는 루트를 선택하고 개척하는 일은 보통(normal) 루트를 오르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14좌 완등 후 보다 어려운 루트를 통해 새로운 등반을 계속 시도한 대표적인 산악인은 예지 쿠크츠카. 하지만 로체(8,516)에 재도전했다가 남벽을 오르던 중 700㎙를 추락해 사망했다.

알파인 스타일과 난코스 선택은 필연적으로 장비의 경량화·최소화를 요구한다. 인간이 최소한의 인공장비에 의존해 산과 사투하고 교감하는 것이야 말로 알피니즘의 영원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한국인 최초로 8,000㎙급을 오른 것은 1977년 고상돈씨에 의한 에베레스트 등정. 한국의 자이언트 등정사 23년만에 엄홍길씨의 쾌거가 이룩됐다. 엄씨의 14좌 완등은 끝이 아니라 한국 산악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이다. 산은 여전히 거기에 있으니까.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0 13:17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