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목숨 건 바둑' 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실 사지가 멀쩡한 고바야시가 중환자 조치훈에게 1:2로 리드당한다는 건 패배 이상의 고통이다. 사실 조치훈을 냅다 꽂아버려도 비인간적이니 어쩌니 질타받을 지 모르는 판국에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중환자와의 승부에서 오히려 뒤지고 있다니….

사실 고바야시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실력으로야 이미 뒤지고 싶은 맘이 없고 객관적으로도 고바야시의 상승세가 돋보이는 시절임에도 오히려 이 괴상한 한국인의 투혼 앞에 자신이 흐느적거린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붕괴였다.

고바야시는 삭발을 단행한다. 사실 우리도 결의를 다질 땐 삭발투혼을 자주 보여주지만 일본인은 우리보다는 흔한 편이다. 고바야시는 삭발이 이즘 익숙해 있었다. 여담이지만 일중 수퍼전에서 중국의 네웨이핑에게 내리 일본의 고수들이 쓰러지자 고바야시는 후지사와와 함께 속죄의 삭발을 단행하기도 한다.

물론 이번 삭발은 부끄러움의 표시가 아니라 승리의 결의를 다지기 위한 삭발이었다. 그 삭발의 효험을 본 탓일까. 고바야시는 다시금 힘을 쓰기 시작하며 내리 3연승을 기록하며 4:2로 기성을 따내고야 만다.

4:2, 아니 4:0이면 또 어떤가. 조치훈은 불의의 교통사고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나아갈 바가 바둑임을 만천하에 과시하면 휠체어를 탄 몸으로 기어이 자신과 싸워나갔다.

그후로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조치훈의 일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야 만다. 사실 조치훈이 교통사고로 입원할 당시 일본 저널은 몇몇 기사에게 “당신도 조치훈과 같은 상황이면 바둑을 둘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반응은 여러가지였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프로페스(profess:공언하다, 주장하다)에서 나온 말이므로 이럴 때일수록 프로들은 태도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다케미야와 린하이펑은 명확했다. “전 두지 않습니다. 두어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부상의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다케미야 마사키) “전 치훈씨와 같습니다. 둘 가능성이 있을 때는 둡니다.”(린하이펑)

어느 쪽이 옳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기사의 인생관이므로. 단 이 대목에서 공통점을 굳이 발견한 것이라면 조치훈과 린하이펑의 일치된 견해다. 두 사람은 대만과 한국에서 이국땅을 밟은 일종의 용병이다.

따라서 초주검의 중상을 입더라도 둘 수 있으면 둔다고 하는 건 그 자체가 삶에 관계되는 부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정신력이라고 할 것인데 예로부터 일본 바둑계를 좌지우지해온 인물이 우칭위엔부터 린하이펑 조치훈 등이고 보면 이방인들의 좌우명은 일본인 그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리라.

그들은 일본을 믿어도 살아갈 수 없고 믿지 않아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바둑이라는 의미가 그들에게는 목숨과 동등한 것이다.

1986년 3월13일 오후 7시48분. 조금 전부터 투덜거리지도 않고 조용히 두어오던 조치훈은 머리를 숙이며 “없습니다”라고 돌을 거둔다. 일본 바둑계의 거성으로 올라선지 3년만에 전부를 잃은 조치훈. 그는 철저하게 무관으로 전락한다. 흥망성쇠는 승부세계에도 있는 법이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자리로 옮기는데 3년의 세월이면 고작 30세의 조치훈에겐 너무 큰 시련이었다.

새로운 패자가 탄생한다. 고바야시 고이치. 일본인이 그토록 열망하던 ‘메이드인 저팬’ 고바야시 고이치. 그렇다. 일본인은 스스로 용병을 길러 융성함을 기대했으나 그 용병으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바둑계에 대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던 터였다. 그러다 이제나 저제나 일본인 일인자가 탄생하기를 학수고대했으니 그 소원을 풀어준 이가 바로 고바야시 고이치였다. <계속>


<뉴스와 화제>

ㆍ 요다, 일본 명인전 도전권 획득

한국기사 킬러 요다 노리모토가 천신만고 끝에 일본 명인전 도전권을 획득했다. 요다는 도전권이 유력시되던 대만 출신 왕밍완이 리그막판 1패를 당해 자신과 동률을 이루게 되자 동률재대국 끝에 천금같은 도전권을 거머쥔 것.

현재 명인은 조치훈인데 조치훈이 작년 본인방 상실에 이어 올해는 기성마저 상실, 최대위기를 맞고있어 요다로서는 타이틀 획득의 최적기를 맞이한 셈이다. 도전 1국은 9월초 개막된다.

ㆍ 응씨배 4강전 개막 임박

바둑올림픽 응씨배 준결승이 22일부터 이틀 간격으로 3번기로 펼쳐진다. 이번 4강전은 강릉에서 펼쳐질 예정인데 이창호-위빈, 창하오-왕밍완의 4강 대결이다. 중국은 위빈이 지난 LG배 우승의 여세를 몰아 또한번 이변을 준비중이고 대만의 왕밍완은 일본 본인방을 따낸 상승세가 무섭다.

그러나 3번기라면 역시 이창호가 가장 강력한 후보이며 창하오의 조심스런 우세도 전망된다. 이번 준결승 3번기는 바둑TV에서 생중계할 예정이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8/1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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