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태, 해결 가닥 잡혔다

경영개선계획 발표로 '극적 타결'

‘왕자의 난’으로 촉발된 5개월여간의 현대 사태가 이젠 정말 종지부를 찍는 것일까.

정부 및 채권단과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여온 현대가 휴일인 13일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현대 사태는 일단 극적으로 타결됐다.

하지만 5월31일 ‘3부자 동반퇴진’을 골자로 한 대국민 약속을 발표했다가 오히려 화를 불렀던 전력을 감안하면 사태를 무작정 낙관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특히 자구계획이나 계열분리안은 최소 B학점 이상이지만 가신그룹 퇴진 등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지배구조개선안은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는 평가다.


왕회장 현대차 지분 매각키로

이번에 발표된 경영개선계획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분은 현대자동차 계열분리에 걸림돌이 돼온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 매각.

현대는 이달중 지분 9.1% 중 6.1%(1,220만주)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에 매각, 현대건설의 장기 회사채 매입자금으로 활용키로 했다. 돌 하나로 ‘두 마리의 토끼’(계열분리와 유동성 확보)를 잡은 셈이다.

자구계획의 경우 지난달 11일 제출한 내용과 비교할 때 수치상으로는 1조4,890억원에서 1조5,175억원으로 고작 285억원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내용상으로는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다.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했던 서산농장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및 인천철구공장 부지 매각 등을 제외하고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주식 23.9%, 현대중공업 주식 6.9% 등 계열 주식을 교환사채(EB)로 발행해 유동성을 확보키로 했다.

외환은행측은 “이번 자구계획으로 현대건설측이 이르면 10월부터는 차입금 상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상당히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지배구조개선과 관련해서는 “부실 책임 경영진 퇴진 문제는 현대측이 스스로 판단해 이사회나 주주총회를 통해 결정토록 한다”는 모호한 내용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정부·현대 한발씩 양보

그렇다면 자구계획, 계열분리, 지배구조개선 등 3개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내걸며 이중 어느 하나도 미흡하면 안된다는 강경입장을 보여왔던 정부와 채권단이 한발짝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한가지 사례가 지난 9일 김경림 외환은행장의 돌출발언.

김 행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현대가 5월31일 발표한 ‘3부자 퇴진’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헌(MH) 현대 아산 이사회 회장은 이미 물러난 것으로 봐야 하는 만큼 정몽구(MK) 현대·기아차 회장도 퇴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이 ‘현대사태 조속처리’를 지시한 직후 나온 발언이었던 만큼 정부의 의중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오전부터 이상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유탄에 전전긍긍하던 현대자동차측이 “발언의 의미가 와전된 것”이라며 여유만만한 태도로 돌변한 것. “더이상 할 말이 없다”며 함구하던 외환은행도 급기야는 “5월31일 대국민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원칙론을 재확인한 것일뿐이다.

자구안 마련 등 사태해결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 위해 더이상 ‘MK 퇴진’문제는 거론치 않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김 행장이 진념 재경부장관, 이근영 금감위원장,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등 새 경제팀과 비밀리에 오찬 회동을 갖은 직후였다.

도대체 오찬회동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길래? 재경부측은 “계열분리, 자구계획, 지배구조개선의 채권단 3개 요구사항을 즉각 수용할 것을 현대측에 최후통첩키로 의견을 나눈 것”이라고만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회동은 김 행장의 돌출발언 파장을 수습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현대로부터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냉철히 판단해 현대측과 네고를 벌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칫 수위를 넘어설 경우 사태의 조속해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고 말했다.

‘시간’과 ‘알맹이’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변수 속에서 최대한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기 위한 수위조절에 온 신경을 쏟았다는 얘기다.

결국 정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처리에 대한 전향적 태도에 부응, 정부측도 가신그룹 퇴진 등 지배구조개선 문제에 융통성을 보임으로써 예상보다 1주일 가량 앞서 해법을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측 성실이행 여부가 관건

이번 타결안이 ‘차선책’이라는 점 때문에 남아있는 의구심도 여전히 많다. 첫번째가 현대건설의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 지분을 EB 발행을 통해 처분한다지만 주식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만큼 영향력은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점.

특히 EB 매입기관이 주식교환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현대건설은 지주회사로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의 계열분리 시한이 당초 거론됐던 2001년보다 다소 늦은 2002년 상반기로 조정된 것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을 통해 현대중공업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MH측의 숨은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것.

이밖에 현대건설의 이라크 미수금 회수 등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유동성 확보방안도 물음표를 남기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장은 정부와 채권단, 현대가 난산끝에 탄생시킨 ‘현대 해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장 관계자들은 “자구안의 강도는 미흡하지만 현대와 채권단이 합의한 것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대가 얼마나 성실히 자구안 등을 이행할 것인지가 관건”이라는 반응이다.

한화경제연구원 사공은덕 연구위원은 “기업의 문제는 부채 규모보다 자금의 순환이 더 중요하다”며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시장의 불안감은 일부 걷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주 증시와 자금시장이 주요한 가늠자가 될 전망. 특히 자금시장의 경우 그동안 ‘현대 먹구름’ 때문에 수개월동안 신용 경색 현상을 보여왔던 만큼 먹구름이 걷히면서 기업의 숨통이 트이게 될 지 주목되고 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주식시장이나 자금시장이 일시적으로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안심을 할 상황은 아니다”며 “현대나 정부가 후속조치에 충실히 임하지 않을 경우 ‘반짝 해결’에 그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태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7 11:49


이영태 경제부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