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 모두가 '패자' 일뿐

뇌졸중 증세가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는 김모(42)씨는 최근 집 거실에 큼지막하게 자녀 등 가족이 지켜야할 수칙을 적어놓았다. 집안에서 뛰지말 것, 시끄럽게 하지 말 것, 미끄러운 곳이 없는지 항상 조심할 것 등이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가족 중 누구라도 다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국민 모두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가 11일 2차 폐업에 들어가면서 국민의 분노는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번 기회에 왜곡된 의료체계를 바로잡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어 양측의 갈등은 우려스러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인터넷 홈페이지(www.kma.org)가 해킹을 당하고 병원 방화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의사집회에 참가한 의사를 경찰이 폭행한데 대해 잘했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감정적으로 치닫는 의료폐업사태

13일 0시께 의사협회 홈페이지 초기화면은 ‘Red Club’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익명의 해커가 올려놓은 호소문 화면으로 바뀌었다.

이 해커는 “만약 계속 당신들이 돈돈돈을 위해 국민을 외면한다면 우리 해커들도 당신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며 “이 글을 보시는 해커분들은 의사와 관련된 모든 사이트를 해킹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의사에 대한 ‘전면 사이버 공격’을 해커들에게 촉구했다.

이날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진료를 거부당한 50대 남자가 홧김에 불을 지르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의사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다. 의사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의료계 페업에 대한 언론보도와 시민단체의 주장이 왜곡됐다고 비난하면서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어도 언론과 관변 시민단체에서 떠드는 것을 보면 지금 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 내 자신이 비참해집니다. 정말 최악의 의료공백사태를 만들고 싶은가 보군요.

정권과 언론과 시민단체들은…(중략) 계속 왜곡시키며 사태의 진실을 비껴나간다면, 지도부에서 아무리 응급진료체계를 유지시키라고 해도, 어차피 사표는 내놓았고 당신들이 그렇게 바라는대로 조만간에 수리될 것이고, 수많은 의사들이 사법처리될 것이고 저 먼저 병원을 떠날 것입니다”라고 감정을 삭이지 못했다.

12일 의사들의 연세대 집회와 경찰의 원천봉쇄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원색적 욕설과 비아냥으로 가득찼다. ‘observer’라는 네티즌은 참여연대 자유게시판에 ‘탄압의 현장에서’라는 글을 통해 “전경들이 문이라는 문은 다 가로막고 집회를 위해 모여든 의사들을 방패로 치고 있습니다.

바닥엔 깨진 안경과 벗겨진 신발이 떨어져 있고 전경에게 맞았는지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는 젊은이도 봤습니다. 설마 정부가 이런 식으로까지 탄압할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자 ‘시민군’이라는 네티즌은 ‘정부, 전경들 너무들 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의쟁이들을 그 정도로 솜방이로 다루다니… 걔네들은, 철방망이 휘둘러도 깜짝 안할 애들이예요… 더 쎄게, 터프하게 다루어 주셔야 돼요”라고 비아냥거렸다.

‘시민’이라는 네티즌도 “환자의 고통을 한번 느껴보라는 뜻에서 전경들이 그런 거겠죠”라며 “목숨이 위태위태한 중환자에 비하면 당신네들의 상처도 과연 상처라 할 수 있을까요”라고 조롱했다.

여론 지도층은 의료대란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린 채 증오로 증폭되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홍창의 명예교수는“정부와 의료계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문제가 워낙 복잡해 오해가 많은 것 같다”며 “감정싸움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부·정치권 무능력 드러내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이 의료계와 시민의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의사의 집단폐업을 막기 위해 10일 의보수가 대폭 인상 등을 골자로 한 대책안을 내놓고 의료계는 물론 여론의 반발만 샀다.

의료계는 정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고 시민단체도 “정부가 이익집단의 압력에 굴복해 시민의 주머니를 털어 달래려 한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민노총과 노총은 의료보험료 납부거부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6월 1차 파업에 이어 이번에도 사태해결은 커녕 법과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난만 높아지자 의료시장 개방, 전공의·전임의들이 제출한 사직서 수리 등 강경대책을 마련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들은 시민단체대로 대규모 집회를 벌이면서 의협지도부 항의방문, 폐업철회 스티커붙이기, 매일 낮12시 자동차경적울리기 등 본격적 실력행사에 나서 양측의 갈등은 이제 물리적 충돌을 향해 달려가는 양상이다.

여론도 의사의 잇단 집단폐업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인데다 정부가 의료수가까지 대폭 올리겠다고 하자 폭발 직전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현재 정부의 대책은 왜곡된 의료체계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의료계의 주장은 의사협회와 전공의 비상대책위, 의권쟁취투쟁위원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

약사의 임의·대체조제를 완전히 막을 수 있도록 약사법을 개정하고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 재구성, 의약분업파동으로 인한 구속자 석방 및 수배해제다. 약사법 개정은 가을 정기국회에서 재개정하겠다고 여야 영수가 합의해 서면으로 약속해야 하고 특별위는 의사가 과반수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협과 의쟁투는 이밖에도 일간신문에 낸 광고에서 위험이 없는 일반약은 편의점이나 수퍼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약사도 환자요구시 조제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짬뽕값도 안되는 진료비”항변

명분은 의사의 진료권과 처방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 많은 의사들이 여론의 질타를 무릅쓰고 집단폐업을 감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않다. 실제로는 의약분업으로 인한 수입감소로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부의 일관적인 저수가 정책으로 이미 일부 진료분야는 전공의 지원이 급감하고 병·의원도 경영악화로 허덕이고 있는데 약판매 수입까지 떨어져나갈 경우 의료계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의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다음 글을 읽어보면 의사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일반인이라며 실명을 밝히지 않은 네티즌은 “환자 한명을 정성껏 진찰하고 처방전을 내면 괜찮은 중국집 짬뽕 한 그릇 값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무조건 저수가 정책을 써온 탓입니다. 따라서 의사들은 환자를 많이 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중략) 지금까지 의사들은 환자 진료할 때마다 보는 손해를 의약품 마진으로 메꾸어 왔으나 이제 이것마저도 정부가 칼을 들고 내놓으라는 겁니다.(중략)

우리나라의 언론과 시민단체는 하나같이 손 안대고 코 풀고 싶어합니다. 전문적으로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에게 진찰받고 싶으면서도 지금보다 돈 1,000원 더내라면 ‘내가 봉이냐’고 외치는 게 지금 우리나라 지식인입니다.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그만큼 부담은 커져야 하지요”라고 적었다.


여론 질타에 협상가능성 높아져

의료계의 주장에 대해 시민단체나 정부의 입장은 의사들이 일단 진료에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6월말 1차 폐업 당시 약사법중 일반약 낱알판매 조항을 고치고 의보수가 처방료와 조제료를 현실화하라는 의료계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는데 이제 와서 또다시 약사법을 의료계의 주장대로 개정하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여론의 반발이 심각한 양상을 보이자 일부 전공의들은 자원봉사 형태로 업무에 복귀시키는 등 투쟁수위를 낮추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 폐업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협상팀까지 구성돼 정부와 협상타결의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의료대란이 수습되더라도 정부와 정치권의 어설픈 정책시행과 환자를 볼모로 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무려 2개월여간 국민이 겪은 상처의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송용회 주한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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