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미국대선] 고어 '도덕성 카드' 뻬들었다

러닝메이트 리버만 선택, 민주당 노선 변혁 예고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조지프 리버만(58) 상원의원(코네티컷주)이 확정된 7일, 미국의 시청자들은 TV 뉴스에서 하루종일 한가지 화면을 보아야 했다.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정점에 달했을 때 리버만의 상원 연설 장면이었다. “그런 행위는 부적절할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또 어린이에게 무엇이 용납할 수 있는 행위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해롭기까지 하다.”

민주당 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클린턴에게 퍼부어댄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이 화면의 이미지는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리버만을 최후 낙점한 이유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제는 클린턴 추문이 주는 비도덕적인 이미지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결별시키겠다는 것이다.


클린턴 추문으로 부터의 결별

‘도덕성’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조지프 리버만은 고어에게 최상의 카드였다고 볼 수 있다. 1988년부터 상원의원으로 10년 넘게 활동하면서 리버만은 ‘의회의 양심’, ‘도덕적 십자군’으로 꼽힐 정도로 깨끗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해왔다.

정치적 동지이자 예일대 로스쿨 동창으로 친한 친구인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비난에 앞장 섰던 것도 평소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해왔고 독실한 유대교도로서 종교적인 생활을 강조해왔던 그의 소신의 결과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후보의 도덕성을 선택의 제1기준으로 여기는 국민에게 클린턴 섹스 스캔들로 감표요인을 안고 있는 고어로서는 이런 이유로 그의 도덕성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버만은 당내 중도주의를 내세운 ‘뉴 데모크라트’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 민주당이 매달려왔던 노선을 과감히 벗어던진 ‘뉴 데모크라트’는 민주당 집권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고어 진영은 외교·국방·가족문제 등에서 리버만의 주장을 대거 인용하고 있다.

특히 외교나 국방 문제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걸프전 당시 강경정책을 주장하고 보스니아 내전의 지상군 파병문제 등에서는 크로스보팅까지 하면서 강력한 지지를 표시할 정도로 보수적 면모도 보였지만 낙태나 개인의 총기소유 등의 문제에서는 진보적인 의견을 내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그의 이런 독립적 활동경력이 점점 탈이데올로기화하고 무당파(無黨派)로 변해가는 유권자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또 평소 세금인상을 반대해왔고 연예산업이 청소년에게 끼치는 폐해를 역설, 이에 뚜렷이 반대입장을 보여온 그였기에 주부를 중심으로 한 중산층에 어필할 수 있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첫 유대인 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로는 처음으로 유대인이라는 점도 눈길을 모았다.

미국의 월가를 비롯,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을 장악한 유대계는 민주당 후보의 선거 참모로 여러 사람이 활약해왔고 키신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 이어 마지막 아성이던 국방부에도 코언 장관을 진출시켰지만 부통령 후보로는 리버만이 처음.

그는 전체 유대인 중에서도 약 10%에 해당하는 정통파 유대인. 금요일 일몰 후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안식일에는 여행도 안하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성냥불도 긋지 않는 이들의 생활방식 때문에 언론들은 후보 발표 이후 “과연 그가 안식일에 정치활동을 할 것인가”라며 궁금해 하기도 했다.

리버만은 이에 대해 안식일에도 의회 표결과 중요한 회합에는 참석하지만 선거운동은 하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문제는 유대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이 선거에 어떤 변수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통령 후보 확정 직후 “매부리코를 가진 유태인 녀석”, “유태인들이 이미 장악해놓은 언론을 이용, 그를 밀어줄 것”이라는 네티즌의 부정적인 반응이 있기도 했지만 실제 선거에 미칠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다.

유대인을 후보로 내세움으로써 유대인층의 표를 흡수하겠다는 것은 유대계가 전체 미국 인구의 약 3% 정도 밖에 차지하지 않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현실감이 없다.

마찬가지로 몰몬교나 남부 일부의 반(反)유대를 명백히 내세우는 층이 깎아먹을 표에 대해서도 이들은 원래 이미 공화당 지지세력인 것이 역대 선거에서 확인된 만큼 리버만의 등장에 따른 영향은 별로 없다는 분석이다.


지지도 급상승, 부시 바짝 추격

리버만은 평소 친이스라엘 정책을 지지했던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인식, 후보 확정후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이슬람계에 대해 유화적 입장을 나타냈다.

또 “유대인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겠느냐”는 래리 킹의 질문에 “미국 국민은 나의 종교가 아니라 내가 부통령이라는 직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냐에 따라 투표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미국 국민은 관용적이고 열려있다”고 주장했다.

14일부터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동안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여론조사에서 계속 밀려왔던 앨 고어는 이 ‘리버만 카드’가 참신한 바람몰이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후보 확정 직후 7일 밤 CNN, USA 투데이, 갤럽 등이 실시한 퀵폴에서 고어는 43%의 지지도를 기록, 부시의 45%에 바짝 붙는 모습을 보여 지난주까지 11~17% 정도 밀렸던 고어의 마음을 가볍게 했다. ABC 여론 조사에서도 리버만은 유권자의 70%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런 추세가 지속돼 전당대회를 정점으로 판세를 뒤집으려는 고어의 의도가 실현이 될지, 그래서 그가 주장한 대로 40년전 카톨릭계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던 존 F 케네디에 이어 ‘유대인 리버만 카드’가 미국 사회의 강고한 분열을 허물고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7 20:04


이윤정 국제부 y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