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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22)] 부시(武士)②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장 먼저 전국적 토지 측량인 ‘겐치’(檢地)에 나섰다. 겐치는 앞서 1588년에 시작된 농민의 무장 해제인 ‘가타나가리’(刀狩)와 더불어 새로운 사회질서의 구축을 겨냥한 조치였다.

겐치에 따라 지샤(寺社·절과 신사)나 토호의 토지 지배력이 크게 약화했고 농민은 가타나가리에 의해 무장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전직과 이주의 금지로 단순 생산자층으로 고정됐다.

이는 무사의 독점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쓰치잇키’ (土一揆·농민봉기)가 잇따른 것은 물론 무장한 정토종 신도들이 약 100년간 가가(加賀·현재의 이시카와)를 지배하는 등 무사계급의 지배력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도요토미가 신분의 유동성을 엄격히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흥미롭다. 도요토미 사후 천하의 주인을 가리는 세키가하라(關ケ原) 싸움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이런 정책을 그대로 이었다.

그 결과 에도(江戶·도쿄)에 바쿠후가 들어서고 도쿠가와 집안이 대대로 쇼군(將軍)의 지위에 올라 통치권을 행사한 에도시대 들어 무사는 ‘학쇼’(百姓·농민)나 상인·장인 등과 완전히 구분됐다.

에도시대의 신분제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농공상을 엄격히 구분했다. ‘사’(士)의 중심세력이 선비가 아니라 무사였다는 점에서만 달랐다. 전체 인구의 약 7%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 무력은 물론 바쿠후의 관료로서 통치·행정 전반을 독점했다.

에도시대 들어 무사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무엇보다 칼을 찰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얼핏 뭐 그리 대단한 권리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무력이 국가권력의 독점적 권리라는 점에서 개인의 무장권은 통치권의 부분이양을 의미한다.

군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개인이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예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칼을 찰 수 있는 권리는 이른바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으로도 이어졌다.

무사는 농·공·상인의 무례에 대해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도 살인죄를 추궁받지 않는 면책특권이었다. 물론 정당한 사유였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는 했다. 또한 무사만이 성(姓)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특권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가 무사에게 축복만 안긴 것은 아니었다. 100년의 전란 끝에 찾아 온 평화는 싸움이 고유 임무인 무사의 존재 근거를 위협했다. 실제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오늘날의 인원정리를 연상시키는 무사의 대량 실직이 있었다.

현재 일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즈오카(靜岡)현의 차밭도 애초에는 실직한 무사들이 산지를 개간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에 머물렀으며 대다수는 낭인 무사로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중앙이나 지방의 한(蕃)에 자리를 얻은 무사의 지위도 날로 쇠퇴해갔다. 애초에 무사는 토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쌀 ○○석의 영지를 분배받았으나 에도시대 들어 화폐경제의 발달은 이를 ○○냥의 화폐로 바꾸었다.

토지와 분리된 무사는 성아래 마을에 거주지를 두고 성으로 출퇴근했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조카마치’(城下町)의 상업자본에 예속돼 갔다.

흔히 일본의 무사를 ‘사무라이’(侍)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일정 지위 이상의 무사만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그 범위가 한결 좁다. 사무라이는 ‘귀인의 곁에 대기하다’는 뜻인 동사 ‘사부라후’(さぶらふ)의 명사형인 ‘사부라이’에서 나왔다. 애초에 천황가와 귀족의 신변경호가 임무였으니 요즘으로 치자면 경호원에 해당한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래 최고 통치자인 쇼군의 직속 사무라이는 스스로도 사무라이를 두었고 이런 2차 사무라이조차도 일반 서민보다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무사집단 내의 항쟁이 치열해지고 위계 질서가 흔들린 센코쿠(戰國)시대에는 하급 무사를 포함한 모든 무사를 사무라이라고 불렀지만 일종의 미칭에 지나지 않았다.

또 에도시대에는 농공상에 대한 지배계급이라는 의미가 강해졌지만 하급 무사는 여전히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무라이에 들지 못했다. 사무라이는 그 특수한 신분상의 지위상 서민은 물론 하급 무사의 원망과 불만을 살 수 밖에 없었다. 하급 무사의 이런 불만은 나중에 메이지(明治) 유신의 원동력이 됐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08/2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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