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위크지 '위기씨앗론' 거론, "환란 불씨 여전" 경고

"아시아가 불안하다"

아시아 경제위기는 완전히 끝났는가? 불과 2년전 만해도 전세계를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고갔던 아시아 지역의 환란(換亂)은 이제 겉보기에는 사실상 끝이 났다.

각종 경제지표도 아직은 미흡하나마 환란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다. 7월27일 개막된 제7차 아세안(ASEAN) 지역포럼(ARF)에서도 경제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북한의 23번째 회원국 가입과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한반도 화해가 핵심이슈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환란의 거친 파고를 헤쳐나온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세안의 빅4가 안도의 긴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세안 경제구조가 새로운 위기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경고가 적지않다.

1997년 태국의 바트화 폭락으로 촉발한 위기의 큰 불길은 잡혔으나 타고 남은 재가 새로운 불씨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지대 창설 서둘러라”

아시아의 ‘위기 씨앗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타임 자매지인 아시아 위크. 이 주간지는 최신호에서 아세안은 최근 또다시 어려운 결정을 뒤로 미루고도 웃고만 있어 다음 위기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어려운 결정이란 아세안의 자유무역지대(AFTA) 창설에 관한 것이다. 지난 5월 아세안 10개 회원국 경제장관이 미얀마에서 만나 자유무역지대 창설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동차 관세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AFTA가 중요시되는 것은 아세안이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해 시장을 하나로 통합할 경우 97년과 같은 경제위기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이다. 시장이 넓어지면 외국 투자는 늘어나게 되고, 생산력 증가에 따른 대외 수출도 활발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환란이후 아세안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방법으로 AFTA의 출범만한 수단이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90년대 초만해도 아세안은 AFTA내 관세율을 5%로 낮추고 궁극적으로는 0%상태로 만들어 시장을 통합하기로 했다. 적어도 2003년까지는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무역 환경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 때도 2007년까지 이루기로 한 AFTA 창설목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전문가들이 없지 않았으나 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AFTA라는 큰 그림이 자꾸만 훼손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부정적 태도

AFTA 구상에 부정적인 국가는 역시 말레이시아. 환란당시 미국의 음모론을 제기하며 독자적인 외환관리정책을 고수했던 말레이시아는 이제 자국 자동차 산업의 보호를 주장하며 AFTA의 무관세제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관세를 철폐할 경우 서구의 자동차가 시장을 장악해 ‘환란이 차란(車亂)으로 바뀌는’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퇴진 등 정치경제적으로 ‘격변의 시대’를 보냈던 인도네시아도 섣부른 관세인사 조치에 반대한다.

이처럼 아세안의 빅4중 두나라가 AFTA에 부정적인 태도로 돌변하자 아세안 자유무역지대는 해외투자가들에게 더 이상 매력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아세안 회원국들이 ‘함께 살자’는 게 아니라 ‘나만이라도 살아야겠다’는 식으로 해외자본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어 앞으로는 서로 얼굴을 붉히는 볼썽사나운 장면까지 연출할 전망이다.

아세안은 AFTA를 보완하는 장치로 한국과 중국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는 10(아세안 10개국)+3(한중일) 시스템의 가동을 생각하고 있으나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런 참에 태국의 바트화 등 동남아시아의 통화들이 지난달 폭락하는 바람에 ‘아시아 위기가 재발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새 경제위기설을 부추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아시아 위크의 진단이다. 아세안 지도자들은 위기가 어느정도 수그러들자 뼈를 깎는 구조조정 대신 과거의 방식이 여전히 통할 거라고 낙관하고 있는 것 같다.


해외자본유치에 어려움

그러나 주변상황은 이미 급격히 변해버린 상태다. 아세안 노동자들의 기술 수준은 주변국인 인도로 가는 소프트웨어 분야 투자를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임금도 중국과 경쟁할 정도로 낮지 않다.

97년 환란이후 중국과 인도, 중남미, 동유럽 등이 적극적으로 자본유치에 나서 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형편이다.

실제로 아세안 빅4 회원국과 한국에 대한 민간자본의 순유입액은 96년의 1,023억 달러에서 97년 2억 달러로 감소했으며 98년에는 276억 달러가 순유출됐다. 새천년들어 한국과 중국 등으로는 자본 유입이 크게 늘어났으나 빅4 회원국에는 환란전과 같지 않다.

일본이 일본·아세안 종합교류기금을 신설하고 우선적으로 2억5,000만엔을 베트남 등 4개국에 지원하기로 했으나 전체적으로 충분한 상태는 아니다.

또한 아세안 주변에서 이뤄지는 국가간 게임방식이 변해버렸다.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창설된 아세안은 더 이상 정치적 배려에 의한 혜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과거 미국 등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이해를 그렇게 공격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안보를 경제보다 우위에 두려하지 않는다. 과거와 같은 안일한 자세로는 치열한 경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아세안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인상이다.


취약한 금융구조등 경제시스템이 문제

미국의 아시아문제 전문가인 톰 플레이트 UCLA대 교수는 최근 미국의 잇따른 금리인상으로 단기자금이 고수익을 찾아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아시아의 ‘산소’(oxygen)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산소론’인데 아시아가 곧 질식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담고 있다. 그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아시아 국가들의 취약한 금융체제및 체질을 들었다.

미국의 금리인상 처럼 예견된 충격마저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만큼 허약하다면 미래는 뻔하다는 시각이다. 그러니 97년 환란을 초래했던 통화약세 조짐이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경제위기가 곧 재발하리라는 징후는 아직 없다. 아시아 국가들이 ‘개혁피로’감에 쌓여 있지만 경기회복및 경제성장세는 여전하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올해 초 ‘2020년 아시아의 산업경쟁력’이란 보고서를 통해 아세안은 5%대의 견실한 성장을 이룰 것으로 내다보았고, 그 전망은 아직까지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금융시스템 등 구조개혁을 게을리할 경우 통화위기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경고는 항상 뒤따르고 있지만.

아세안에 다시 경제위기가 닥치더라도 97년과 같이 ‘아시아발(發) 세계경제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아세안 자체의 취약한 금융및 경제구조에 따른 위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특히 아세안은 수년안에 도래할 수 있는 경기하강 국면에서 내부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고, 그럴 경우 위기재발은 불을 보듯 뻔해 한국과 같은 주변국가들은 미리 미리 대비를 해야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08/2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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