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10월호'를 구하라

‘붉은 10월호를 찾아라’

톰 클랜시의 역작 ‘붉은 10월호’에서 구소련이 신형 핵잠수함을 추적하듯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해에서는 침몰한 최신예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를 구하려는 러시아측의 노력이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잠수함에 갇힌 러시아 승무원들을 구출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극히 낮아 생명의 불꽃은 점차 꺼져가는 상태다.

쿠르스크호가 승무원 118명과 함께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해 108m 해저바닥에 가라앉은 것은 8월12일. 쿠르스크호는 당시 러시아 북해함대의 대규모 해상 훈련에 참가중이었다. 일단 선내 폭발사고 또는 다른 잠수함과의 충돌에 의해 침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특히 러시아가 영국 등의 지원을 받아 승무원 구조작업에 나섰고 방사능 누출 우려 마저 대두돼 전세계의 이목이 바렌츠해에 쏠려 있다. 오스카Ⅱ급인 쿠르스크호는 2기의 원자로를 가지고 있으며 탄도 및 순항미사일 24기를 비롯한 다양한 핵무기와 어뢰를 장착하고 있다.


침몰원인

블라디미르 쿠로예도프 러시아 해군사령관은 15일 쿠르스크호가 훈련 도중 충돌을 일으켜 침몰했으나 무엇과 충돌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해함대 관계자는 영국 잠수함일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 잠수함과의 충돌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또 다른 잠수함이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왕립해군은 당시 어떠한 잠수함도 현장에 있지 않았다며 자국 잠수함의 관련설을 부인했다. 미국도 해군 정찰함 로열호가 사고해역 부근을 정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시인했지만 잠수함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폭발설이다. 잠수함내 장착된 어뢰나 다른 폭발물이 터져 선체에 손상을 입혔다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1968년 5월 대서양을 항해중이던 미국 공격핵잠수함 스콜피온(SSN-589형)에서 마크37 어뢰가 배터리 불량으로 폭발, 잠수함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선례가 있다.

그러나 어뢰든 핵무기든 자체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어뢰의 경우 일단 발사돼야 신관이 활성화해 폭발가능 상태가 되며 발사된 뒤라도 유도 와이어를 통해 폭발의 조절이 가능하다. 때문에 러시아는 2차 대전당시 사용된 불발 기뢰에 의한 외부 폭발 가능성을 함께 조사중이다.

사고당시 미해군과 노르웨이가 사고현장으로부터 거대한 폭발음을 감지한 것으로 알려져 현재까지는 원인은 미상이지만 일단 폭발에 의한 사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고함의 상태

쿠르스크호는 현재 108㎙ 해저바닥에 비스듬히 얹혀있는 상태다. 러시아가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사고함은 선수부분부터 사령탑까지 크게 파손됐고 통신은 물론 생존자의 인기척조차 감지되지 않고 있어 상당수 승무원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함의 원자로는 13일부터 일단 정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120일간 부상(浮上)없이 잠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쿠르스크호지만 원자로가 정지되면 산소공급이 불가능하다.

보조동력인 배터리가 있지만 침몰시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가동된다는 보장이 없고 작동된다 하더라도 장시간 버틸 수는 없다.

당초 17일께 산소가 바닥날 것으로 추산됐으나 쿠로예도프 사령관은 25일까지는 함내의 산소가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각종 정황으로 미뤄볼 때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잠수함을 단번에 침몰시킬 정도의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면 선내 상황은 최악에 가깝다는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잠수함 사고를 경험해 본 퇴역 군인들은 낮은 수온으로 인해 쿠르스크호는 이미 거대한 냉장고로 변했을 것이며 승무원들이 생존해 있더라도 이산화탄소의 급증으로 두통과 호흡곤란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핵유출은 없는가

러시아는 사고함의 원자로는 안전하며 훈련중이라 핵무기는 장비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아직 어떠한 방사능 유출의 징후도 감지되지 않았으며 원자로 역시 견고하게 밀폐돼 있어 왠만한 충돌에는 파손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군사전문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의 폴 비버도 “원자로 이상이었다면 침몰이 아니라 수면위로 부상했을 것”이라고 말해 핵유출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그러나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아무리 훈련중이라 하더라도 전략핵 잠수함이 핵무기를 떼놓고 바다를 떠돌아 다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전략핵 잠수함은 전시든 평시든 상관없이 출항과 입항외에는 절대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을 만큼 늘 실전상태로 운영되는 존재이다.

또 선체가 심하게 손상을 입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면 원자로의 상태에도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불안정한 선체속의 원자로 및 핵물질들이 시간이 지나도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 대량의 방사능 유출이라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 안보위원회의 환경위원장으로 일했던 생태학자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쿠르스크호의 원자로의 시동이 꺼졌으며 방사능 누출 위험이 없다는 러시아 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방사능 누출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야블로코프 전 위원장은 “원자로의 시동이 꺼졌더라도 충분히 냉각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으며 폭발의 가능성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구조작업

한마디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러시아 해군은 사고해역에 22척의 군함을 파견, 14일부터 총력전을 펴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상이 불량한데다 사고함이 가라앉은 장소는 두꺼운 진흙층으로 돼 있어 시계마저 제로에 가까운 상태다.

당초 미국과 영국이 구조 지원의사를 밝혔으나 러시아는 서방에 자신들의 최신예 잠수함의 정보가 넘어가는 것을 꺼려 일체의 지원을 거부했다.

그러나 생명이 우선이라는 국내외 여론과 자국장비의 성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16일 영국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블라디미르 푸틴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모종의 지원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LR5 구명잠수정을 장비한 영국의 구조팀과 노르웨이의 심해잠수부들이 사고해역으로 급파돼 19일부터 구조작업에 착수했다.

LR5 잠수정은 쿠르스크호로 접근해 해치에 도킹, 기밀실(氣密室)형태의 통로를 만들어 한번에 16명씩의 승무원을 구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영국·노르웨이 구조팀이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바렌츠해는 아직도 냉전중

냉전이 종식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쿠르스크호가 침몰한 바렌츠해는 아직도 열강들의 치열한 군사력 경쟁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 전략연구소의 해군 전문가인 조애나 키드는 “바렌츠해에 출몰하는 러시아 함정의 수는 현격히 줄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은 이 지역 상황을 계속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긴장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바렌츠해는 무르만스크와 세베로모르스크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북해함대의 주요활동무대. 나토군은 러시아 해군의 전력을 파악하느라, 러시아군은 나토군의 동태를 감시하느라 서로 ‘쫓고 쫓기는’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쿠르스크호가 침몰했을 당시에도 나토군 소속 잠수함들이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미 국방부가 밝혔다.

더구나 쿠르스크호가 사고 당시 참여중이던 훈련은 지난 몇년이래 최대 규모의 것으로 러시아가 올해말 동부 지중해에 항공모함 파견을 앞두고 실시한 것이어서 나토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민에 빠진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대통령은 취임후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우며 그 일환으로 군사력 강화를 추진했지만, 쿠르스크호의 침몰로 그 계획이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됐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해군의 날인 지난달 30일 “러시아가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선 함대 규모를 늘려야 한다”며 야심찬 해군력 재건게획을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푸틴의 계획은 본격 추진되기도 전에 타격을 입게됐다고 현지 군사전문가들과 언론은 지적했다.

러시아 해군은 지난 10년동안 3군중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1,000여척의 함정을 감축하고, 잠수함도 3분의 2수준으로 줄였으나 열악한 재정사정으로 해군 유지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이에따라 해군은 함정 수리와 훈련 등을 위해 필요한 예산의 10%만을 지원받고 있다고 군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쿠로예도프 해군사령관은 7월 중순 “예산이 늘어나지 않으면 2016년에는 겨우 60첨의 함정이 유지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더욱이 자존심만을 내세운 늑장대처로 승무원들의 목숨을 저버렸다는 국내외 여론의 질타는 그의 통치방식에 심각한 도덕적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 러시아 오스카 Ⅱ급 잠수함 제원

ㆍ배수량: 13,900톤 (길이:154m 폭:18.2m 높이:9m) ㆍ엔진구성: VM5 DNJSWKFH(380MW) X2, GT 3A xjqls(98,000마력)X2, 스크루 2기 ㆍ속력: 잠항속도 28노트, 해상순항속도 15노트 ㆍ승무원: 107~130명 ㆍ주요무장: 탄도미사일 24기(SSN 15, 16, 19, 27) 어뢰발사관 6기(21인치 X4, 26인치X2, 각종 어뢰 및 대함 미사일 28기), 폭뢰 32기

● 러시아 핵잠수함 사고 일지


ㆍ1970년 3월: 스페인 연안 1척 실종, 승무원 88명 사망 ㆍ1980년 8월21일: 에코 Ⅰ급 日 오키나와 인근 화제. 9명 사망, 50명 부상 ㆍ1983년 6월: 캄차카 반도 연안 1척 침몰 ㆍ1986년 10월3일: 버뮤다 해안서 1척 화제. 3명 사망, 3명 부상 ㆍ1989년 4월7일: 노르웨이 앞 500㎞ 해상 콤소멜츠호 침몰. 42명 사망 방사능 유출 ㆍ1992년 5월29일: 북해함대 1척 폭발, 1명 사망, 5명 부상 ㆍ2000년 1월29일: 바렌츠해 1척 공기 잠금장치 공장. 2명 사망 ㆍ2000년 8월14일: 바렌츠해 쿠르스크호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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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훈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8/24 12:00


이주훈 국제부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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