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조치훈은 무관, 일본은 춘추전국시대

'메이드인 저팬' 고바야시가 독야청정하던 그날로부터 조치훈은 무관의 설움을 삼켜야 했다. 주변의 관심은 일단 몸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승부사 조치훈에게는 쓸개를 씹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큰 부상, 그리고 무관-. 우리의 주인공 조치훈은 어디까지 드라마틱하도록 타고난 것일까. 정상을 알고 밑바닥의 아픔도 맛보고, 그런데 또 그 다음은 어김없이 새로운 시작이다.

이즘 바둑 저널은 조치훈을 '뉴치훈'이라고 부른다. 뉴치훈이라면 지금까지 접해왔던 조치훈과는 뭔가 분명 다를 것이다. 그이 형 조상연은 이 대목에서 또다시 되뇌이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말했지요. 치훈이는 드라마틱한 별자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24세부터 29세에 걸쳐 황금의 5년은 잔혹한 드라마로 막을 내린다. 그렇지만 조치훈은 실망하거나 비관한 적이 없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언제나 늠름한 낙천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3월 기성을 잃고 조치훈이 7대 타이틀에 복귀하는 시간은 고작 4개월 밖에 걸리지 않는다.

7위 기전 기성-. 이름은 1위 기전과 같지만 일본 발음으로 1위 기성은 기세이, 7위 기성은 고세이. 어쨌든 타이틀 홀더에 다시 올랐다는 건 조치훈의 저력이고 고바야시로서는 불길한 징후다. 오다케 히데오에게 3연승을 거둔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1년이 지난 1987년엔 또 그 작은 기성을 빼앗겨 그냥 9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맞이한 건 천원전. 랭킹 5위 기전이요, 타이틀 보유자는 고바야시 고이치. 도전자 결정전에서 만난 상대는 가토 마사오였다.

이 시절 가토 마사오는 희한하게도 고바야시의 기세를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명인을 고바야시에게서 앗아갔고 십단 왕좌 고세이 등 4관왕에 빛났다. 다만 1위 기전 기성과 3위 본인방이 고바야시의 몫이라서 일인자라는 목소리는 내지 못했으나 개수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희한한 것은 일본의 실력자가 수도 없이 많아 조치훈이 일인자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고바야시가 당장 확실한 일인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 이른바 전국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사상 최고의 라이벌 열전을 펼치는 과도기로서 숱한 준재들이 활개치던 형국이라고 보면 되겠다.

결국 조치훈은 가토를 제쳤고 고바야시를 만나게 된다. 벌써 2년이 흐른 후였다. 고바야시는 기성과 천원을 가진 불안한 1인자. 그러나 조치훈에게 고바야시는 넘고 싶은 상대일 뿐, 그가 가진 타이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2년을 별러온 리턴매치는 너무나 싱겁게 끝나려 한다. 제1국은 2집반패, 제2국은 1집반패. 일찌감치 0:2로 조치훈은 막판에 몰리고 말았다.

제3국을 앞두고 열린 전야제에서 무관이며 도전기가 막판에 몰린 위기의 사내답지 않게 조치훈에게서는 인간적인 여유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12개 타이틀 중 10개를 따보았습니다. 남은 두 개 중 하나는 천원전이고 만일 그것을 이기면 성전환 수술을 하여 여류본인방에도 도전하여 제 인생을 마감하려 했는데 내일 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 모처럼 예약해둔 정형외과는 취소하고 역시 사내대장부의 한길로 가겠습니다.

이미 0:2로 뒤지고 있어 막판에 몰린 조치훈의 여유는 하나의 복선이 되고 만다. 남은 세판은 조치훈에게는 모두 절벽에서의 승부.

아마도 그 상대가 고바야시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때문일까. 제3국은 고바야시에게서 악수를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에서도 조치훈은 완승을 거두고 만다. 불과 127수만에 흑불계승. <계속>


[뉴스와 화제]


■ 조훈현 후지쓰배 우승

조훈현 9단이 중국의 창하오를 물리치고 후지쓰배를 안았다. 지난 8월12일 일본에서 속개된 제13회 후지쓰배 결승에서 조훈현은 중국 일인자 창하오에게 흑으로 가볍게 불계승을 걷고 우승, 지난 1994년에 이어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중국의 창하오는 재작년 이창호에게 패한 이후 또다시 조훈현에게 패하여 후지쓰에서만 두 번의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편 목진석은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를 반집차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 여류 박지은 유창혁 꺾어

'여자 유창혁'으로 불리우는 박지은 2단이 8월16일 벌어진 KBS 바둑왕전에서 유창혁을 꺾어 파란을 연출했다.

박지은은 지난 3월 기전 16강전에서 조훈현을 꺾어 순수 국내 여류로서는 처음으로 4강까지 진격해 화제를 모았었다. 이로써 박지은은 패자 준결승까지 내달았었는데 과연 그녀가 승자결승에 진출해 있는 이창호와 만날 것인지 벌써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일기전에서 조훈현 유장혁 등 타이틀 보유자 두명을 꺾은 건 중국 출신 루이나이웨이 이후 처음.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8/2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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