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치 생명줄은 '바른 소리'

“우리 국회에서 날치기를 없앤 국회의장으로 남기를 바란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IPU 세계 국회의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8월26일 출국하기 직전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에서 날치기 추방 의지를 거듭 밝혔다.

지난 7월 국회법 개정안의 본회의 날치기를 거부한데 대한 국민의 박수는 그에게 각오를 더욱 다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68세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의장에게도 요즘 ‘오빠 부대’가 생겼다. 국회 인터넷 사이트(www.assembly.go.kr)에는 “만섭오빠, 사랑해요” 등 이 의장을 지지하는 네티즌의 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회 인터넷 게시판에는 “오빠의 지조있는 모습은 다 죽어가는 국회를 살린 생명수와 같다”는 등의 글이 실려 있다.


국민들 박수, 여당선 볼멘소리

7월24일 민주당과 자민련은 국회 운영위에서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교섭단체 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하지만 본회의라는 문턱을 지키고 있는 이 의장은 국회법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 자체를 거절했다.

이 의장은 본회의 사회권을 국회 부의장에 넘기는 일도 하지 않아 부의장이 대신 날치기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의장의 처신에 대다수 국민은 박수를 보냈으나 자민련과 상당수 민주당 의원은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당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이 의장은 인기관리만을 위해 여당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의장 선출을 잘못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이 의장은 1993년 국회의장에 선출됐을 때도 날치기를 끝까지 거부해 여당 지도부로부터 미움을 산 적이 있다. 그는 직언을 하거나 소신을 굽히지 않아 종종 여권 지도부의 눈 밖에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러 정권과 정당을 넘나들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국회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당총재 두번, 여당의 당대표 서리와 총재대행 등 네차례 당 간판 역할을 했다.

1963년 이후 국회의원 8선, 공화당 당무위원, 한국국민당 총재(1985~1988년), 국회의장(1993년), 신한국당 대표서리(1997년), 국민신당 총재(1997~1998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1999년), 새천년민주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1999~2000년), 국회의장(2000년) 등이 그의 화려한 이력서다.


곡절 많고 드라미틱한 정치역정

이 의장의 정치역정은 곡절이 많고 드라마틱하다. 그는 쓰러질 듯 하다가도 다시 일어서곤 했다. 연세대를 졸업한 이 의장은 5·16 직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최고회의에 출입하다가 박정희 의장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써 필화로 구속되는가 했더니 얼마뒤 공화당 공천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공화당 소장의원 시절 입바른 소리를 자주하던 그는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1971년부터 8년간 정치활동 공백기를 맞게 된다. 그는 1993년 문민정부때 재산공개 파동으로 낙마한 박준규 국회의장의 후임을 맡았으나 예산안과 안기부법 등의 날치기를 거부하는 뚝심을 발휘해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1997년 신한국당 대표서리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한 뒤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고 이인제 후보가 주도한 국민신당에 합류했으며 1998년 9월 국민신당 의원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이 의장이 정치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3공, 유신, 5공, YS, DJ 정권에서 매번 성공한 경력을 갖고 있는데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상황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

타이밍에 맞춰 결정적 선택을 잘 한다”는 등의 비아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 정가 관계자들은 이 의장의 성공 비결에 대해 “이 의장이 결정적으로 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면서도 소신있고 깨끗하게 처신해온 게 정치적으로 장수하는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손을 비비며 출세하는 사람과는 다른, 이 의장의 독특한 처세법도 연구 대상”이라며 아부형 정치인과는 분명히 선을 그어 이 의장을 평가했다.

김광덕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29 20:44


김광덕 정치부 kd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