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26)] 장성익 3R 사장(上)

디지털 영상 세계 최강을 꿈꾼다

사장실에 앉아서 누가 인터넷에 들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 있다면 그 사원들의 기분은 어떨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모든 개개인을 감시·통제하는 ‘빅 브라더’가 따로 없다고 느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시스템 자체가 바로 빅 브라더일지 모른다.

다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기막힌 시스템을 범죄를 예방하는 ‘감시의 눈’으로 이용하고,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는 데 활용한다면 오히려 이 사회를 밝게 하는 ‘효자 기술’이 되지 않을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화상 솔루션을 개발한 (주)3R이 그런 기업이다.

디지털 영상·데이터 전송 분야에서 세계 최강자를 꿈꾸는 3R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개개인의 컴퓨터 위에 놓여 있는 마우스만한 웹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만 먹으면 이 카메라를 통해 현재 누가 인터넷상에서 무엇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다.

실제로 그 프로그램을 가동하다가 “너무 한다”는 사원들의 불만에 부딪쳐 걷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인터넷에 접속해 다자간 문자 음성 화상회의가 가능한 시스템인 i-bi와 화상채팅 솔루션 i-ce의 개발로 이어졌고 이제는 20여명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솔루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장성익(33) 3R 사장은 “모든 솔루션은 3R이 갖고 있는 디지털 영상처리의 원천기술을 응용한 것”이라며 “디지털과 영상이 만나면 우리 사회가 더욱 편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응용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비용도 거의 들지 않습니다.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기술이 디지털을 만나 IT(정보통신)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봅니다”라고 자신했다.


디지털 영상 기술에 대한 확신

디지털 방식에 대해 탁월한 이론을 지닌 장 사장은 서울대 공학박사 출신이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마다하고 굳이 사업의 길을 택한 것은 석·박사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디지털 기술을 현실화하고 싶은 욕망 때문.

1995년 박사학위를 딴 그는 산학협력 관계에 있던 (주)삼정에서 1년 정도 일하다 동료 및 후배 8명과 함께 직접 창업에 나섰다. 1996년 10월이었다. 장 사장의 은사인 서울대 교수 10여명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그때는 벤처라는 단어조차 생소했어요. 모든 걸 우리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주)삼정과 산학협동체제가 구축돼 있어서 사무실이라든가 각종 기자재 등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막상 회사를 세웠지만 제품개발에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3R이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마케팅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중순께다. 주력제품은 DVR(Digital Video Recorder). DVR은 한마디로 감시카메라로 알려진 기존의 CCTV를 디지털화한 것이다. 아날로그 테이프 대신 디지털 영상저장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 네트워크를 통해 디지털 동영상을 압축하고 실시간 전송까지 가능하다.

주변에서는 장 사장을 ‘준비된 기업가’로 부른다. 대학원 전공이 디지털 통신인데다 박사학위 논문은 ‘디지털 화상처리에 의한 초점조절 알고리즘 및 구현’이어서 디지털과 영상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이론적 기초가 돼 있었던 것이다.


주위 반대와 IMF 딛고 일어서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터졌다. “주변에서 모두 반대했어요. 특히 부모님은 왜 하필이면 장사꾼이 되려고 하느냐고 극구 말렸습니다. 디지털과 영상을 합친 최첨단 기술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고 설득해도 막무가내였죠. 사업이라는 게 결국 장사꾼이 아니고 뭐냐는 시각이었어요.”

‘사업=장사꾼’이라는 편견을 교정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뭐 할 게 없어서 장사꾼이냐”는 주변의 입방아는 그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장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뜻을 더 크게 가졌다. 처음부터 재미도 있었고 기술개발도 순조로웠다. 기술개발이 끝나 제품을 만들려고 했을 때 더욱 큰 일이 터졌다.

“막 일어서려는 때였어요. 어렵게 기술을 개발해 이제 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무렵 IMF가 터졌어요. 기술 외엔 워낙 가진 게 없어서 잃어버리고 뭐고 할 만한 게 없었던 게 다행이었어요. 운이 좋았던 편이지요. 만약 그때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었다면 망했겠죠. 이런 제품을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었을 겁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IMF위기 시절엔 제품을 팔래야 팔 수가 없었다. 개발쪽만 남기고 모든 부문을 줄었다. 월급도 거의 없었다. 어떤 때는 200만원을 갖고 한달을 버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내부적으로 결속은 더 탄탄해졌다.

그는 그때의 어려움을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큰 경험으로 생각한다. 장 사장은 IMF를 거치면서 중요한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돈의 무서움과 인적 자원의 중요성이다.

“요즘 벤처들은 돈을 모은 뒤 사업을 하기 때문에 돈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아주 위험한 발상이죠. 우리는 IMF를 거치면서 풀뿌리 경영을 배웠습니다. 현금 흐름에 늘 신경을 쓰고 기업은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믿게 됐죠. 기업이 돈을 벌지 않으면 국가적으로도 손해입니다.”


'사람 제일주의'

그는 인적 자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회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창의적이고 아이디어 개발에 적극적인 사원을 뒷받침하고 이들에게 자율성을 제공하는 것이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지요.”

그래서 장 사장은 얼마전부터 회사가 입주해 있는 신대방동 보라매 아카데미 타워의 모든 편의시설을 250여명의 직원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R 직원이면 시간에 관계없이 건물 내 영화관에서 무료로 영화를 보고 사우나와 술집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비용을 전액 지원한다. 서적 구입비도 회사가 부담한다.

벤처기업이 연봉과 주식을 대가로 임금협상에 치중해 있던 벤처 초기에도 3R는 늘 ‘사람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이 힘이 매출의 80%를 수출이 차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계속>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08/31 11:1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