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중량구 망우동(忘憂洞)-中

망우리 고개는 서울특별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는 서울의 동쪽 관문이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평생 소원인 나라를 일으키고 남은 문제는 그가 죽은 다음 묻힐 만연 유택(묘자리)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태조는 개국정신인 남재(南在)와 조말생(趙末生)을 대동하고 묘자리를 차증려 행차했다가 지금의 구리시 건원릉(건원릉) 부근에서 세 자리(자리)을 얻었는데, 현재의 건원릉 자리는 원래 남재가 이미 얻어놓은 묘자리었다.

태조는 자기가 잡은 세 자리가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여 남재에게 "서로 바꾸자"고 제의했다. 이에 남재가 아뢰기를 "왕릉 예정지였던 곳에 어찌 뒷날이라도 신(신)을 매장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것은 불경일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중죄를 주시는 것으로 옳지 않다"고 아뢰니 태조가 그 소리를 듣고 "불망기(불망기)를 줄 터이니 이것으로 증빙(증빙)을 삼으라"하고 어필을 주었다.

그리하여 현 건원릉은 태조와 남재가 묘자리를 서로 바꾼 명당자리다. 태조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이르러 산천지세를 둘러보고 "이제야 근심을 있었노라"고 하여(於斜吾憂忘지 '근심을 잊은(忘) 고개'라는 뜻으로 '망우'(忘憂)라는 땅이름이 생기게 되엇다는 얘기다.

묘자리를 바꾼 태조와 남재는 묘지도 송시에 선정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뒤 세상을 뜨는 것도 동시에 하게 되었다.

이에 묘를 쓰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인근 별내면 화접리(花蝶里) 남재 묘소 사이에 줄을 늘여놓고 이를 당겨 신호로 동시에 하관을 하였다 하여 이곳 마을 이름을 주을내 라 하고 내이름도 주을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중량구 망우 1, 2, 3동이 '망우'라는 땅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망우리 일대에는 일제시대인 1933년부터 공동묘지로 개발돼 4만6,000여 기의 묘가 자리갑게 됐으니 땅도 팔자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 '내 사전에서 주검이란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누구에게나 받아놓은 밥상이다. 가끔씩은 인생을 만족하여 바르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글쓰는 이의 편견일까.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망한/ 이 황무한 전장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송이/ 뉘의 위촉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과 마직막 살륙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말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른 천심(天心)에의 길 위에서/ 한점 웃음으로지우려 하는가.' (박양균의 '꽃'에서)

참으로 세상엔 자기를 희생해가며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죽는 의로운 죽음도 많다. 구한말(舊韓末)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순국한 13도(道) 창의군(倡義軍)과 창의군으 주도했던 이인영(李麟榮), 허위, 이강년, 신돌석 장군 등 꽃보다 더 붉은 넋을 기리는 '13도 창의군 탑'이 마우공원에 세워져 있으니. 선현글이여 이제는 망우(忘憂)공원에서 근심걱정을 잊으소서….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0/09/0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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