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황혼…갈곳이 없다] "왜 자식들 눈치보며 살아?"

실버타운… 말년이 행복한 할머니·할아버지들

이헌우(74)씨는 부인과 함께 1년전 서울 약수동의 실버타운 시니어스 타워에 입주했다. “의료시설이 잘 돼있어 안심할 수 있는데다 날마다 둘이서 무슨 밥을 해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이씨에게 시니어스 타워에서의 생활은 기대 이상이다. 상주 의료진이 건강검진을 비롯한 각종 잔병까지 세심하게 챙겨주고 식당에서는 입맛에 맞는 영양식을 비롯,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개인식단을 받을 수 있다.

9년전 충북대 사범대 은퇴 후에도 계속하고 있는 음악 외에 짬이 나면 2층 영화감상실에서 영화를 보고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당구를 칠 수도 있다. 몸이 찌뿌3둥한 날에는 14층의 수영장이나 체력단련실에서 가벼운 운동을 즐긴다. 무엇보다 날마다 오전과 오후로 열리는 각종 강좌에 나가면 비슷한 취미를 가진 새 친구들을 만나 이것저것 배우면서 얘기꽃을 피울 수도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자식들이 좀더 자주 와봤으면 하는 것 외에는 아쉬운 것이 없다. “내가 번 돈은 자식에게 줄 것 없이 내가 써야한다는 평소의 신념 덕에 말년을 즐기고 살 수 있게 됐다. 천국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다. 찾아오는 친구만 있으면 입주를 권한다.


"천국이 따로 없어"

1998년 문을 연 시니어스 타워에는 이씨를 비롯한 144세대가 살고 있다. 입주를 기다리는 대기자도 20여 가구나 된다. 입주자의 평균 나이는 74세. 부부보다는 독신이 조금 많다.

실버 타운의 등장은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년을 즐기겠다는 변화한 생각을 암시한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에 의하면 1996년 현재 노인인구 중 노인 단독세대는 53%. 자녀와 함께 사는 가구는 39%에 불과하다.

그 이유로는 ‘따로 사는 것이 편해서’(35%), ‘자녀가 불편해할까봐’(20.8%), ‘건강할 때까지 독립해 살고 싶어서’(15.7%) 등이다. 이들에게는 실버타운과 같은 노인 위주의 시설과 다양한 활동이 보장되는 공간마련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1998년 조사에서는 노인의 27%가 ‘앞으로 건강이 악화된다면 양로원이나 노인요양시설을 이용하고 싶다’고 했고 33.6%가 ‘앞으로 노인전용주택이 공급된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날로 높아가는 노인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인에게 실버타운에서의 안락한 노년은 아직 남의 얘기다. 턱없이 부족한 시설은 물론이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은퇴 후 고급 실버타운을 마련할만한 경제력을 갖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경남기업이 분당 구미동에 지으려던 시니어 타운은 분양률이 50%를 밑도는데다 해약자가 속출해 오피스텔로 용도가 바뀌었다.

현재 운영중인 실버타운은 꽤 비싸다. 입주비만 웬만한 아파트 한채 값에 맞먹고 다달이 드는 생활비도 결코 적지 않다. 라비돌 리조트는 10년 거주 예치금이 2억5,000만원에 식비와 편의시설 이용료를 제외하고 월 30만원의 관리비를 낸다.

시니어스 타워도 15평형 입주보증금이 1억3,600만원이고 1인당 33만원의 월 생활비를 낸다. 최고급 실버타운을 표방한 노블 카운티의 경우 퇴소시 돌려주기는 하지만 36평형 보증금이 3억4,300만~4억3,000만원이며 가장 큰 72평형은 6억5,000만~8억3,800만원에 이른다.

또 다달이 180만~230만원의 생활비를 내야한다. 시니어스 타워 옆에 얼마전 문을 연 요양원 스타일의 너싱홈은 10평형 일반실 입주보증금이 1억원, 20평대 특실은 2억원, 40평형 VIP실은 2억2,000만원이다. 이밖에 생활비 70만원과 간호비 30만원 등 월 110만원이 든다. 간병인을 두면 액수는 더욱 높아진다. 은퇴 이전에 억대 이상의 저축을 해두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액수다.


경제력이 가장 큰 걸림돌

실버타운이 이처럼 고가인 이유는 높은 건축비용과 넓은 공용면적 때문. 일반 아파트의 경우 건설시 연4%의 장기저리 융자가 가능하지만 실버타운은 관계법령의 미비로 인해 일체의 융자를 받을 수 없다.

IMF 위기 이후 자금난과 건설경기 침체를 동시에 겪고 있는 건축회사로서는 상대적으로 소비자가 적은 실버타운 건설을 꺼리게 될 뿐더러 투자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각종 편의시설 마련에 들어가는 높은 공용면적 비율 때문에 평당 분양가격은 아파트의 2배에 이른다. 아파트의 전용률이 대부분 85%인데 비해 실버타운은 넓은 복도와 각종 오락시설 등을 제하면 50%에 정도에 불과하다.

설사 돈이 있다고 해도 실버타운 입주에는 정서적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 시니어스 타워 등 몇몇을 제외하고 현재 운영중인 대부분의 실버타운은 도심이 아닌 서울 근교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 화성의 라비돌 리조트를 비롯, 유당마을은 수원에, 삼성생명이 분양중인 노블카운티는 용인에 있다.

또 2003년 개원 예정인 한일 합작의 산정호수 실버타운도 경기 포천에 들어선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박재간 소장은 “노인들은 자식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원형 실버타운에 살기를 꺼린다”고 말한다. 답답하고 불편해도 자식과 가까운 도시의 아파트 생활이 시골 구석에 격리되었다는 심리적 소외감 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또 자식에게 신세지기 싫다는 노인들의 변화한 생각과는 달리 아직도 많은 자식은 ‘부모 돈이 곧 내 돈’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보건복지부 노인복지과 이행철씨는 “사업자금에 쪼달리는 자식이 ‘이번 한번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오자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어렵사리 들었던 실버타운을 나오는 사례도 있다”고 말한다.


재정지원 등 정부 노인정책 바뀌어야

실버타운이 노인을 위한 실질적 공간으로 하루빨리 자리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박 소장은 “일반 아파트와 같이 장기저리 융자 등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도심지의 일반 아파트 단지 내에 별도의 실버타운을 마련토록 하는 보건복지부와 건설교통부 합동의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일반 아파트에서 육체적 불편함과 젊은 사람과의 세대차이로 인해 날로 고독 속에 매몰되고 있는 노인이 싼 값에 보다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버타운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영역일 뿐 아니라 동시에 편안한 노후라는 국민 모두의 복지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9/06 17:27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