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표절의 정치

미국의 노동절은 9월 첫째 주 월요일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서구국가에서는 5월에 노동절을 지내는데 비하여 좀 특이한 경우다. 아마도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는 나라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노동절은 미국의 중요한 연휴 중의 하나다. 노동절 연휴를 끝내면 아이들의 새 학년이 시작되며 여름에서 가을로의 계절변화를 알려주는 분기점이다. 특히 올해와 같이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면 노동절은 더욱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여름내 전당대회를 마치고 후보를 확정한 각 당에서는 노동절 연휴를 전후해 귀향한 의원을 통해 선거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절 연휴가 지나면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단거리 경주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선거가 과열되기 시작하면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방 선전도 시작된다. 공직 후보자에게 가장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과 병역 문제 등이다.

물론 클린턴 대통령처럼 도덕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후보 검증과정에서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은 “미국이 과연 아직도 청교도의 나라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미국 민주당의 정치귀족인 케네디 가의 에드워드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도 수십 년 전 있었던 여비서의 의문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 제3당인 개혁당의 대통령 후보 팻 부캐넌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게 됐다. 텍사스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의 한 교수가 “부캐넌이 1998년에 낸 내 책 ‘The Great Betrayal’을 표절하면서 차트와 그래프까지 도용하여 내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미국의 저작권법은 저자의 독창적 표현을 보호하고 있다. 단지 표현을 보호할 뿐이지 그 안에 포함된 아이디어나 사상을 보호하지는 않는다.

로미오과 줄리엣류의 사랑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더라도 셰익스피어가(만일 저작권을 지금까지 행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일 작자의 아이디어를 빌리기 위하여 할 수 없이 그의 표현을 사용하여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출처를 표시하여야 한다.

미국은 표절에 대하여 상당히 엄격하다. 각급 학교에서는 표절을 가장 중대한 징계 사유로 삼고 있으며 제출하는 에세이나 논문에 표절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경우에는 당해 과목을 낙제시킬 뿐만 아니라 학년 전체를 유급시키거나 심한 경우에는 퇴교까지 시킨다.

고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며 법무장관까지 지낸 후 형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역시 암살된 로버트 케네디도 대학 시절 표절을 이유로 징계받은 사실이 있는데 선거운동 때 이를 공표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공개하고 국민의 사과를 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부캐넌의 표절시비도 그에게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표절에 대해는 전통적으로 관대하게 대해왔다. 특히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 치고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대개 자신이 사용하는 교재가 비록 강의하는 교수의 이름으로 출판되기는 했으나 사실은 외국 교과서와 내용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연구기반이 척박한 현실에서는 외국 서적의 충실한 인용만이라도 공부에 도움이 된다며 자위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한국의 학생이 미국에 유학 와서 논문을 쓰다가 표절을 이유로 교수에게 망신당하였다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가끔 서울 소식을 들으면 요즈음 새삼스럽게 교수들의 저서에 대한 표절시비가 불거지고 있는 것 같다. 표절은 물론 근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표절에 대한 판단 또한 사회적 환경을 감안한 것이어야 한다면 표절시비가 태평양 건너서도 또다른 정치적 선전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09/0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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