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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심천개방 20년] 작은 어촌에서 개혁·개방의 상징도시로

북한 ‘심천 모델’로 개성개방 천명

북한은 개성을 중국의 심천을 모델로 해 대외에 개방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가 주축이 돼 개발할 4,000만평 규모의 ‘개성 경제특구공단’은 어떤 정책하에서 어떤 과정을 밟아갈까.

현재로선 답이 없다. 하지만 북한이 심천을 모델 삼아 완전개방된 경제특구로 조성한다고 천명한 터라 중국의 경험은 개성의 내일을 전망하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중국의 심천 경제특구가 지난 8월26일로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20년만에 주민 3만명의 가난한 어항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인구 40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개방전략에서 볼 때 심천과 개성은 지리적으로 닮은 꼴이다.

심천이 화교자본의 본산인 홍콩에 인접했듯이 개성은 대북투자의 주축이 될 남한과 지근거리에 있다. 장차 조성될 개성특구의 남단은 판문점에서 2~3㎞ 거리에 불과하다. 경의선과 도로가 연결되면 개성~서울은 심천~홍콩 이상으로 밀접해질 전망이다.


시장경제로의 대대적 전환 계기

1980년 8월26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15차 회의는 국무원이 제출한 두 개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심천,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를 경제특구로 한다는 ‘광둥(廣東)성 경제특구조례’와 ‘푸지엔(福建)성 샤먼(厦門) 경제특구조례’였다.

전인대 상임위가 이날 정식으로 성립을 선포한 심천, 주하이, 산터우, 샤먼 4개의 경제특구는 중국 개혁·개방의 첨병이었다.

경제특구 건설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작품이었다. 鄧은 경제특구를 중국이 고립을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창구로 구상했다. 그의 말대로 “기술과 경영, 지식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자 대외정책의 창구”로 계획됐다. 鄧이 1977년 여름 복권된 이후 특구건설이 공표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특구 건설을 염두에 두고 1978년 5월 대규모 조사단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으로 파견해 각국의 수출가공구와 자유무역구를 관찰했다.

이를 토대로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에서는 대외개방 정책의 기본틀을 확정했다. 1979년 4월에는 광둥성 지방 지도자들과 중앙지도부가 모여 특구건설의 기본전략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鄧이 광둥성 지도자에게 한 말은 비장했다. “역시 특구를 잘해야 합니다. 중앙은 돈이 없고, 정책만 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해야 합니다. 죽을 각오로 혈로를 뚫어 보십시요.”

鄧이 광둥성과 푸지엔성을 특구로 지정한데는 홍콩 및 대만과 인접하고 있다는 지리적 장점 외에 정치적 고려도 있었다.

당시 대대적 물갈이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치무대에는 여전히 보수파가 상당수 건재해 있었다. 이들은 시장경제적 특구건설이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대륙의 남부에 폐쇄된 실험적 특구를 건설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었다. 남부 4개 특구가 성공한 뒤 鄧이 “상하이(上海)를 함께 개방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한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다.


연평균 성장률 31%, 첨단제품 생산지로

특구설립 후 20년간 심천은 중국 정부의 표현대로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뒀다. 1980년 이래 심천의 연평균 성장률은 31.2%에 달해 20년간 경제규모가 755배 커졌다. 이같은 수치는 아시아 4대 신흥경제지역(NICs)의 성장폭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1999년 선전의 총생산액은 1,436억 위엔(17조2,300억원)으로 중국 도시 중 6위를 차지했다. 1인당 총생산액은 3만6,000위엔(432만원)에 달해 전국 도시 중 1위였다. 67개 국가와 지역이 심천에 세운 외자기업은 1만4,000여개에 이르고, 이들 외국기업의 누적투자액은 200억 달러를 넘는다. 세계 500대 기업 중 76개 기업이 이곳에 자회사를 두고 있다.

1999년 심천의 수출입 총액은 504억3,000만 달러. 이중 수출액은 282억 달러에 달해 연속 7년간 전국 1위를 지켰다. 1992년 이래 심천은 단순가공에서 첨단기술제품 생산지로 탈바꿈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8년간 첨단제품 생산액 증가율은 연평균 56.43%를 기록해 1999년 생산량이 820억 위엔(9조8,400억원)에 달했다. 이 액수는 심천시 전체 공업생산액의 40.5%를 점하는 것이다. 현재 심천은 세계 CD롬 생산의 7.8% 이상, 자기헤드의 3분의1, 시계의 4분의1을 생산하고 있다.

심천의 성공은 중앙정부의 용의주도한 외자유치 정책과 대대적인 권한이양에 힘입었다.

우선 특구정부에 경제관리권한을 대폭 이양했다. 경제권 뿐 아니라 외교, 공안, 징세, 세관, 은행, 외환 등 중앙정부 관할사항도 특구의 특수성을 감안해 재량권 폭을 넓혔다.

둘째, 특구내 기업에 충분한 경영자주권을 부여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요구에 부응토록 했다. 투자계획, 생산과 판매, 관리 및 고용제도를 국가계획이 아닌 기업자율에 맡긴 것이다.

셋째는 세제우대 조치. 10년 이상 생산계획을 가진 외자기업에 대해서는 이윤발생 이후 2년간 소득세 면제, 다시 3년반 동안은 50% 소득세 감면 혜택을 부여했다. 면세기간이 끝난 수출기업에 대해서는 또다시 10% 세감면 혜택을 주었다. 넷째 관세혜택. 원부자재를 수입해 가공수출하는 기업에 대해 수입관세와 부가세를 일률적으로 면제했다.


재량권 강화, 각종세제혜택

토지사용권과 사용료 납부상의 혜택, 외국인 체류기간 및 입국상의 편의제공 등과 함께 특구정부의 재정수입 증대를 위해서도 배려했다. 특구의 재정, 외환수입 중 정액만 중앙정부에 교부하고 나머지는 자체 유보하도록 함으로써 특구정부의 적극성을 장려한 것.

이같은 지방재정 자율성 확대는 오히려 중앙재정수입의 확대를 가져왔다. 중앙정부가 1994~1999년 선전특구로부터 거둬들인 재정수입은 1,020억 위엔(12조2,400억원)에 달했다.

중앙정부는 경제특구를 현재까지 3가지 발전단계로 나눠 정책을 조절해왔다. 1980~1985년의 1단계는 대규모 인프라 건설과 도시화를 진행시킴으로써 이들 특구의 영업·투자환경 조성에 역점을 뒀다. 1986~1995년 2단계는 수출가공업을 위주로 한 대외지향형 경제 구조를 발전, 정착시켰다.

1996년 이후 3단계는 산업구조 선진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통적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고기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변화시켰다는 이야기다. 고수준의 제3차 산업을 확대하고 경제효율을 제고함으로써 대외지향형 경제체제를 성숙시키는 것이 3단계 발전정책의 핵심이다.

심천을 비롯한 4개 경제특구의 초기 성공은 당내 개혁파에 힘을 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의 추가 개방을 불렀다. 1984년 5월15일 다롄(大連), 톈진(天津), 옌타이(煙臺), 상하이, 푸저우(福州), 광저우(廣州) 등 14개 도시가 개방돼 동남해의 중요한 연안지역은 거의 문이 열렸다.

이어 1985년 3월 잉코우(營口)시가 추가 개방됐다. 1988년 4월13일에는 하이난다오(海南島)를 하이난성으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성 전체를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하이난성은 현재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다. 1990년 4월18일에는 마침내 상해 푸둥(浦東)지구 개발을 선포하고 대외개방지역으로 지정했다.

중국에서 경제특구로 정식명칭이 불려지는 지역은 1980년 최초 지정된 4개 지역(심천, 산터우, 주하이, 시아먼)과 1988년 지정된 하이난성 뿐이다. 나머지 추가개방된 지역은 경제특구가 아니라 ‘개발구’(開發區)로 불린다.

푸둥지역은 ‘신구’(新區)로 불리지만 당국은 경제특구에 포함시킨다. 따라서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경제특구로 불리는 지역은 모두 6곳이다. 개발구는 통상 경제특구에 비해 각종 특혜가 다소 적지만 대외개방이라는 취지에는 다름이 없다.


천안문사태 이후 위기 鄧순시로 넘겨

남부지역 경제특구의 발전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鄧 집권 이후 중국 지도부가 개혁·개방의 속도 문제를 놓고 단속적인 내부갈등을 겪어왔던 만큼 특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구가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은 1989년 6월4일 발생한 천안문 사태 직후. 천안문 사태 여파로 당내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특구는 강력한 반대론에 직면했다. 보수파는 “경제특구가 서방 자본주의 풍조를 중국에 유입시키는 주범”이라고 공격했다.

여기서 개혁의 총설계사 鄧이 다시한번 나섰다. 1992년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심천과 샤먼, 산터우 등 경제특구를 순시하면서 지속적인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다.

鄧의 특구 순시는 꺼져가는 개방의 불길을 되살리고 특구의 뿌리를 다시 든든히 했다. 2000년 들어 경제특구는 중앙정부가 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는 중서부 대개발을 촉진시킬 기술과 자금창구로서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총리는 “심천의 미래는 곧 중국의 미래”라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의 개성이 중국의 심천이 될 수 있을까. 북한 전역을 개방할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덩샤오핑의 역할을 해낼 인물이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할 지도 모른다.

심천을 만든 이도 鄧이었고, 심천을 지켜낸 이도 鄧이었기 때문이다. 鄧의 지론은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貧窮不是社會主義)였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입력시간 2000/09/0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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