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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만들어낸 올림픽 영웅들

깨어지지않는 올림픽 신화들

2000 시드니 올림픽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은 항상 드라마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무수한 뒷이야기를 남기지만 깨어지지 않는 신화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근대5종, 근대10종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 ‘가장 강한 남자’로 기록된 짐 토르프. 언론은 그를 ‘인디안’이라고 비꼬았지만 그의 기록 8,412점(1만점 기준)은 15년간 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하던 당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영광일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와 악수를 나누게 됐으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만에 토르프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3년 전 야구를 하면서 돈을 받았다는 것. 금메달을 따낸 뒤 많은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였다. 하지만 아마추어 선수가 이전에 돈을 받았다는 것은 메달 박탈감.

그는 메달을 반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돈을 바랐다면 그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먹고 살 만한 수입이 있었다. 나는 볼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단순한 인디언 학생에 불과했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전혀 인식조차 못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고 또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던지고 때리고 달렸다.”


금메달을 향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

스포츠에 담겨있는 재미라는 건 이제 거의 잊혀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경쟁이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레그 루가니스가 금메달을 따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고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도 마찬가지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을 창안한 쿠베르탱이 ‘20세기를 연 선수들’이라고 극찬한 이들의 기록은 대부분 깨졌고 그중 일부만 올림픽에서 신화를 남긴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사람에 따라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되돌아보면 토르프 같은 인물도 찾기 힘들다.

그는 분명히 경기장 안팎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기에서는 다른 선수들을 멀찍이 따돌렸을 뿐아니라 금메달을 박탈당한 것도 이례적이다.

토르프에게서 금메달을 박탈하고 올림픽 역사에서 그의 기록을 삭제한 것은 또다른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을까. 수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수여하는 구스타프 국왕의 손을 잡으며 “감사합니다, 각하”라고 했던 그는 1년도 채 안돼 아마추어 육상연맹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돼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해야 했다.

그는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썼다. 다행히 그의 기대대로 스포츠 역사가들은 그를 베이브 루스나 잭 뎀실를 제치고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다.

그는 또 사망한지 30년만에, 메달을 반납한지 70년만에 아마추어 자격을 되찾았고, 그의 기록은 인정됐다. 아주 추웠던 1월 어느날 토르프의 자녀들은 구스타프 국왕이 수여했던 두 개를 금메달을 되찾았다.


"출발선에 서면 단두대로 끌려가는 느낌"

파리에서 열린 24회 올림픽. ‘날으는 핀란드’라는 애칭을 가진 파보 누르미는 무려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자니 와이즈뮬러는 수영에서 3개의 금메달을 땄다. 와이즈뮬러는 100m자유형에서 세계 기록을 무려 1분이나 단축했다.

그러나 파리 올림픽이라면 사람들은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누르미보다도, 타르잔과 아슬아슬한 명승부를 연출한 와이즈뮬러보다도 해롤드 아브라함즈를 떠올린다.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아브라함즈는 경기 때마다 강한 강박감을 억눌렸던 친구였다. 그는 늘 주머니에 실을 넣고 다녔다.

첫 발자국의 거리를 재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 직전 그는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 첫 발이 디딜 지점을 표시하곤 했다. 파리에서 그는 110야드를 10.2초에 달렸다. 그의 기록은 무려 30년간 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승 출발선에 섰을 때 “단두대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그는 더이상 달리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스스로 자해했고 경기용 신발도 내팽개쳤다. 그의 은퇴, 혹은 그 시기가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제시 오웬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이다. 독재자 히틀러가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던 그 때, 오웬은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토르프와 마찬가지로 오웬의 투철한 경기정신은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웬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무려 7개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는데 하루에만 6개의 세계기록을 깨거나 타이기록을 냈다. 스스로도 나중에 “대단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역시 넓이뛰기에서였다. 오웬은 두차례 시도에서 실패하고 마지막 시기만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상대는 독일 출신의 루즈 롱. 롱이 순위를 뒤집을 것이란 예측이 파다했다. 오웬의 최종 기록은 26피트. 운명의 날. 롱은 순위를 뒤집기는 커녕 파울을 거듭했다.

결국 금메달은 오웬에게 돌아갔고 롱은 은메달에 머물렀다. 히틀러의 조작이라는 등 뒷말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웬은 이를 무시하고 롱이 동유럽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그와 가깝게 지냈다.

1928년 올림픽은 여자 선수의 참가가 허용된 해. 그 해 ‘달라스의 사이클론’으로 불린 마일드레드 디드릭슨은 80m 허들과 투창 부문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녀는 1936년 게임을 끝으로 골프로 전향했는데 바로 미국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에 올라 이래저래 ‘역사의 인물’이 됐다.

올림픽에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남는 이유는 다양하다. 예를 들면 세바스티안 코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문 경우다. 그는 올림픽 바로 전해 세 개의 세계기록을 갈아치웠고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의 경쟁 상대는 시티브 오베트. 800m 경주에 출전한 코는 계속 맥빠진 모습을 보이다 오베트에게 1위를 내줬다. 그는 게임후 “내 일생에서 가장 망친 게임”이라고 토로했다. 사람들은 그가 800m 경주에서 비실비실한 것만 기억할 뿐 1,500m에서 2연패한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시드니에 쏠린 기록에의 열망

1968년 멕시코 대회는 또다른 면에서 한 인물을 남겼다. 넓이뛰기의 봅 비먼. 그는 디딤판에서 두 차례 파울을 저질렀다. 마지막 시도.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그가 디딤판을 딛는 순간 하늘은 번쩍거렸고, 그의 몸은 이미 공중에 떠 있었다.

그의 기록은 29피트 1/2인치. 종전 기록을 무려 21과 3/4인치나 경신한 것이었다. 내노라 하는 선수들이 33년간 겨우 8과 1/2인치를 늘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의구심이 남는 순간이었다. 또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200m 경기에서 1, 3위로 들어와 올림픽을 휩쓴 ‘블랙 파워’의 상징이 됐다.

기억에 남는 또 한사람은 수영의 마크 스피츠. 멕시코에서는 겨우 릴레이 경주에만 참가, 2개의 금메달에 그쳤던 그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200m를 포함해 무려 7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또다른 스토리가 나올 것이다. 오웬이나 스피츠와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놀랄만한 제2의 비먼이나, 루가니스, 혹은 비실비실한 코가 또 나올지.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0/09/0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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