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대북사업자로 변신한 '은막의 여왕' 김보애

한다면 하고, 안 한다면 안 한다. 한번 한다고 맘먹으면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다. 대북사업가로 변한 김보애(61). 왕년의 인기 여배우가 한번 남북 합작영화를 만들겠다고 작정하자 자기 재산 날아가는 것도 모르고 10년째 맹목의 투신이다. 대체 남북합작이 무엇이길래.

“사실 이건 미친 짓이지. 자식들한테 제일 미안해요. 재산 물려줄 게 없어져서. 그래도 이게 애들 아버지 김선생(김진규)의 유언이기도 하고 나도 이걸 끝내야만 나중에 눈을 편히 감을 것 같아.”

불과 얼마전까지도 반공의 구호가 드높던 서울땅에서 북조선 사람의 공연을 구경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김씨가 바로 그걸 해냈다. 지난 5월 화려한 주목을 받았던 평양교예단의 서울공연. 그녀가 빨갱이 소리까지 덮어쓰며 얻어낸 ‘10년 전쟁’의 작은 전리품이다.

수익은 커녕 30억원이나 날렸지만 마침내 첫 신호탄을 터뜨렸다는 희망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지난 남북 이산가족상봉때 내려온 북한측 지인들도 어찌 소식을 들었는지 “보애 선생도 돈을 벌어야 할 텐데 그렇게 손해만 봤으니 어떡하냐”는 한마디. 그 말에 모든 서러움이 절로 녹아내린, 마음과 의지로 버티는 사업가다.


평양교예단 서울공연은 ‘10년전쟁’의 전리품

거의 혼자 뛰다시피 했다. 처음엔 직원 10여명을 둔 문화기획사 SN21로 시작했다가 한해 10억원씩, 그렇듯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대는 사장 김씨를 보다못해 직원들이 스스로 자리를 비웠다.

NS21로 이름을 바꾸고 최소수정예로 살림을 줄였다. 사실상 단독강행군. 누가 도와주기는 커녕 수시로 통일부에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며 매사 외줄 타듯 살았다.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져 대북사업가니 민간통일사절로 인정받는 터지만 오늘까지 남몰래 치른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에 남북 정상회담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마지막 코너까지 몰렸을거야. 여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채. 하긴 지금도 제게 ‘다음 정부가 바뀌면 다시 옛날처럼 백지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땐 너도 갈 데가 없을텐데 어쩔거냐’고 겁주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통일이란 게 누구 개인의 욕심도 아니고, 민족의 과업인데 이만큼 와서 다시 없던 일로 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겠어? 설령 갈 데가 없어도 뭐, 설마 어떻게든 살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뒷 일이 걱정됐으면 진작에 시작하지도 않았죠.”

잘 못하던 술도 담배도 북쪽 사람들로부터 배웠다. 주로 교섭해온 대상은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들. 물질적으로는 떨어질지 몰라도 항상 정갈한 자세에 사리사욕 모르는 그들에게선 그들대로의 향기가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통일이 왜 필요한가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한 핏줄.

그녀를 이토록 열성적인 ‘통일의 문화전령사’로 변신시킨 건 궁극적으로 영화에 대한 꿈때문이었다.

10년전 우연한 자리에서 한 영화인으로부터 남북 합작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영화인생에 가장 값있는 대업이었다. 오늘까지 그 길닦기에만 10년을 쏟아부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머잖아 남북공동영화 1호 크랭크 인

원하던 남북 공동영화 1호 탄생이 멀지 않았다. 이미 1년전 ‘춘사 아리랑’제작의 계약이 끝난 상태. 시나리오는 4년전에 준비해뒀다. 가장 걸림돌이 되던 통일부의 허가문제도 최근 남북 화해무드와 발 맞춰 곧 사업승인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 그렇게만 되면 곧바로 캐스팅에다 제작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곱씹어볼수록 그야말로 한편의 첩보영화처럼 살아온 그녀의 소득이다.

“그동안 나도 정말 많이 변했지. 옛날에는 천상 여자였어. 학생땐 집과 학교밖에 몰랐고 부모님께 말 대꾸 한번 안해봤어요. 하지만 지금은 깡패 다 됐지. 완전히 왈가닥 다 됐어.”

어려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같은 여자의 마음까지 야릇해진다”며 친구들의 눈을 올려뜨지 못하게 했던 뇌쇄적인 눈매의 소녀.

아버지 나이 마흔에 얻은 고명딸로 고이 자라다가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 당시의 영화판 관습대로 층층 선배의 수발까지 들며 어렵게 배우의 길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당시 1960년대 최고의 인기배우 김진규씨와의 결혼.

남편 김씨는 17세 연상의 이혼남에다 두명의 전처 자녀까지 있었다. 부모의 반대는 극심했지만 결국 자식을 이기진 못했다. 나이는 어렸어도 살림솜씨는 타고난 신부였다. 야무진 일솜씨와 요리실력에다 손재주도 뛰어나 옷도 직접 지어 입고 살았다.

남편과의 나이차를 줄여보려고 평소에도 한복만 입으며 노숙한 체 굴기도 했고, 누가 물으면 나이를 올려말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전처의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인 양 우기기도 했다. 그래봐야 아무도 믿지 않았으리란 걸 몇십년이나 지나고서야 깨닫게 됐지만.

대신 배우의 꿈은 갈수록 위축됐다. 남편과의 약속대로 결혼후 남편이 나오는 영화에만 출연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대표적인 출연작은 ‘종자돈’, ‘고려장’ 등.


사연많은 인생, 후회는 안해

그처럼 열성적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러나 3년만에 파국을 맞고 말았다. 남편의 외도때문이었다. 그 이후 세번의 결혼과 세번의 이혼을 더 경험했다. 어떤 사람들이었고 왜 끝나야 했는가는 생략하기로 한다. 너무나 많은 사연을 꺼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김씨는 사랑에 대해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란 것이다. 스스로도 “일부종사하진 못했지만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후회해본 일은 없다”고 말할 만큼 언제나 자신의 사랑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정열이 있었고, 책임감이 있었다.

심지어 언젠가 사랑했던 사람이 사업중 부도로 황급히 종적을 감춘 뒤에도 법적 부부도 아닌 자신에게 몰려든 빚쟁이들에게 그녀는 두말없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주며 빚잔치를 치렀다. 그리고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는 그녀를 주윗사람들이 더 나무랐다.

그리고 그 마지막, 전남편 김진규씨와의 재결합이 있었다. 70대의 병자로 돌아온 그의 임종을 그녀가 지켰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냐구요? 그건 사랑이기 이전에 의무감 같은 거예요. 어쨌든 아이들의 아버지니까.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든다 안든다 싸워도 부부간엔 마음 깊숙한 무엇이 있어. 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무엇. 그리고 김선생은 정말 큰 배우였어. 팔십이 다 된 나이에도 자신이 배우란 걸 한시도 잊질 않았거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텐데도 배우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옷 하나도 함부로 입는 법이 없었어. 임종 순간까지도 배우를 사랑했던, 진짜 배우였어…. 에이,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뭐하러 자꾸 물어봐. 다른 재미있는 얘기해요.”


돈이 제발로 따라 붙은 여자

그녀에게 재미있는 얘기란 영화 얘기 아니면 사업 얘기, 자식 얘기다. 사업, 그녀는 돈버는 실력에서도 고수다.

한마디로 ‘돈이 제 발로 따라붙는 여자’다. 아플 때 말고는 한번도 일에서 쉬어본 적이 없을만큼 천성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아둥바둥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돈이 잘 쫓아오더라는 것이다. 그녀가 벌인 장사치고 망하거나 궁했던 적이 한번도 없다.

1960년대 ‘희원’이란 한정식집으로 시작, 한때 소위 권력층의 단골로도 유명했던 식당 ‘세보’를 경영하는 등 평생 자력으로 생활했다. 1980년대 초엔 100억대 재산을 가진 당대 여배우중 최고의 재력가이기도 했다.

독특한 것은 연예인 출신이지만 나긋나긋한 서비스는 커녕 오히려 권력자들의 ‘하명’에 유난히 뻣뻣하기로 소문나있었다는 것. “영화배우 친구나 후배를 소개해달라”는 은밀한 압력성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술 한잔 따르라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취중의 그로부터 냉면 대접째 기습세례를 받아 국물과 국수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봉변도 당했다.(그 당사자는 이튿날 술이 깬 뒤 찾아와 정중히 사과했지만 그녀 스스로 “치사해 못하겠다”며 장사를 끝내버렸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장사가 잘 됐는지도 모르지. 나한테 술 따르라거나 한잔 같이 마시자고만 하면 ‘그럴려면 나가라. 다음부터 여기 오지말라’고 했거든. 그들 눈엔 건방졌을지 몰라도, 난 안 한다면 절대 안 해.

그래도 돈 복이 있기는 있는지 벌기는 진짜 많이 벌었는데 하지만 많이 벌면 또 뭐해. 옛말에 버는 놈 따로 있고 먹는 놈 따로 있다고. 그렇게 실컷 벌어놓으니까 그 다음에 사기를 당하든지 꼭 뭔 일이 생겨서 결국 다 털리고 안 남아나더래니깐. 나 참.”

작년 8월에도 또한번 사기. 마지막 재산이던 아파트 8채를 깡그리 날렸다. 이제까진 잃어버린 돈 찾느라 속 썩는 게 싫어서 소송 한번 내지 않았던 그지만 이번엔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 처음 변호사를 불렀다. 지난 1989년엔 심각한 간질환으로 두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 풍파를 어떻게 다 견뎌냈는지 용할 정도다.


“사랑은 거부할 수도 없는것”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 그녀에게 가장 큰 낙은 10월에 있을 영화배우 출신 딸 진아(36)씨의 결혼소식이다. 사위가 될 미국인 케빈 오제이씨는 미국내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국제부동산 투자금융회사 한국지사장.

비록 한국어 한마디 통하지 않는 벽안의 청년이지만 장모의 사위사랑이 벌써 한계수위를 넘친다. “내 딸, 정말 시집 잘 가는거야. 내가 마음이 놓인다고 했어. 외국인이면서도 오히려 동양적이고 몸가짐도 반듯하고 시집 식구들도 좋으시거든. 진아랑 정말 잘 살거야.”

그 흔한 여자들의 계모임 한번 해본 일이 없고, 사람 셋만 모여도 골치가 아프다는 자발적인 외토리. 그나마 많지 않던 친구들마저 대북사업을 시작하자 제 몸 사리느라 떠나가버렸다.

요즘은 차라리 잔 꾀 없고 소탈한 북한 친구들이 더 마음 편하다. 취재가 있던 날 아침 자신이 손으로 직접 잘랐다는 김씨의 산뜻한 커트머리에 감탄하다가 문득 질문 하나를 더 던져보았다.

그녀의 나이 60대. 만약 지금 또 누군가 구애를 한다면 김씨라면 어떻게 할까. 대답을 듣는 덴 1초의 공백도 없었다. “망설일 게 뭐 있어! 또 온다면 연애하고 살 수 있으면 사는거지. 어떻게 사랑을 거부할 수 있겠어.”

이미 수십년전에 배우생활이 끝난 김씨가 왜 아직도 그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여전히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듯 했다.




"민간의 대북 노하우 무시하면 안돼"

10년 세월이 길긴 길었을까. 지난 8월23일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만난 NS21 대표 김보애씨는 “지쳐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 지친다”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에다 이산가족상봉 등 통일의 진입로가 열리는 듯한 요즘이야말로 오히려 힘이 날 법 한데도 사실은 아예 말귀가 통하지 않던 노태우·YS 정부 때보다 차라리 더 외롭다는 얘기였다.

그 이유는 정부가 민간업자의 성과도, 노고도 도외시하고 있다는 소외감 때문이었다. 대북 문화사업에 관련된 김씨의 속내를 들어보았다.


-정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하고 있다고 보는가.

“본격적으로 남북 문화교류사업에 나서겠다는 문화관광부가 실제로 10년이나 앞서 현장을 뛰어온 민간의 성과에 대해선 아예 귀를 기울일 시도조차 않고 있다. 우리의 공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다. 효율적 정책을 위해서라도 그동안 민간쪽에서 무엇을 어디까지 해놓았는지, 최소한 그간의 이야기부터 듣고 가는 게 순서 아닌가. 하다못해 집안살림을 아는데도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

가뜩이나 장관이 잘 바뀌는 요즘, 당장 정부에선 지금부터 당국끼리 알아서 하겠다고 하지만 조직시스템이 전혀 다른 두 조직이 처음 만나 호흡을 맞춘다는 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특히 북한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듣는 소리가 ‘당신네 나라는 왜 그리 전문성이 없냐’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다. 중복되는 얘기지만 이같은 현실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 차선책은 우선 기존 민간단체의 축적된 자료부터 흡수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단계 더 발전된 정책을 짜는 것이다. 왜 상식적인 길을 두고 돌아가는지 답답하고도 한편 서운하다.” -일각에서는 우리가 북한에 끌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오랜 기간 북측과 직접 교섭을 벌이며 상황을 지켜본 민간업자의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보는가.

“다분히 그렇게 비칠 소지가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우리 현실이다. 왜냐하면 북측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당국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꾸준히, 그리고 철저히 장기계획이 수립돼 왔다.

즉, 지금 그들이 터뜨리는 것은 어제 만들어낸 즉흥의 깜짝쇼가 아니라 이미 한참 전에 준비돼 있다가 단계별로 하나씩 꺼내 던지는 예정된 투구다. 반면에 우린 노태우 대통령과 YS정부 등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이제 갓 출발하는 단계에서 당장 준비된 게 없다보니 당분간은 그들을 쫓아가기도 바쁜 듯이 보이는 거다. 중요한 것은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거다. 국민이든 정부든 너무 조급한 비판이나 태도보다는 당분간은 현실에 순행해가면서 안으로 하나하나 치밀하게 준비해 차차 우리 페이스를 찾는 것이 최선이라 본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09/07 19:5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