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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그릇 역사기행(24)] 산청(上)

찻그릇 역사기행차 산청을 가다가 남북 이산가족의 교환 상봉장면을 TV를 통해 보았을 때 기행자는 불현듯 30년전의 만난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북측 방문단의 단장으로 내려온 유미영이었다.

유미영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68년 봄날 동학의 발생지인 경주시에 위치한 기행자의 생가에서 그의 남편인 당시 천도교교령 최덕신과 함께였다. 기행자의 선친 최남주(고고학자)와 최덕신의 집안은 같은 동학가문으로서 오래전부터 세교(世交)가 있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분단의 비극적 정치현상으로 두 내외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갔다가 새로운 배역을 맡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무엇인가 우리 현대사가 몹시 혼돈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각설하고 임진왜란은 당시 서부경남의 진주, 산청, 하동 일대에 사기장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고금을 통해 전쟁은 개인과 가정을 참담하게 파괴시키고 이산의 통한(痛恨)을 역사 속에 남긴다.

하동 사기마을 가마터에서 산청으로 가다보면 양보면이나온다. 양보면 소재지 입구에는 몇해 전에 세운 여대남 대사(呂大男大師)의 큰 비석이 나온다. 여대남 대사는 임란 당시 이곳 하동 양보면 출신으로 어린 나이로 가토 기요마사군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망향의 슬픔 에 성장하여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가토의 원찰)의 유명한 주지스님이 되었다.

그는 어느날 극적으로 인편을 통해 하동의 아버지와 편지내왕을 하게 되었다. 전쟁통에 부자간의 생사확인이 된 것이다. 그는 가토의 아들에게 부자간의 이산의 아픔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본국으로의 송환을 간청하였으나 가토가 차일피일 송환을 미루는 바람에 끝내 이국땅에서 가족을 그리면서 열반하고 만다.

기행자는 1989년 가을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를 답사하면서 400년전 여씨 부자가 주고받은 편지(혼묘지의 보물)를 주지스님의 배려로 배견할 수 있었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니 이산의 아픔이 구구절절 담겨져있어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산가족의 슬픈 편지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알 수 있게 하였다.

임란이 남긴 상흔은 산청에도 있었다. 산청군 단성면 방목리가마터 옆마을에 홍호연(洪浩然)이란 소년이 살고있었다. 홍씨 소년은 1593년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서 이산의 아픔을 삼키며 열심히 학문연구에 정진하였다.

그후 홍호연은 일본 전역에 학문과 서예로 크게 이름을 떨쳤고 나이 일흔이 되자 왜장의 아들에게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십 차례 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1657년 왜장의 아들 가쓰시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후로 ‘인’(忍)자를 가족에게 남기고 망향의 한을 자결로써 끝맺었다. 홍호연의 이야기는 일본에 끌려간 조선 사기장인의 이야기와 함께 임란 이산가족의 아픔을 오늘날 한·일 양국의 역사에 전해오고 있다.

요즘 산청으로 가는 길은 무척 좋아졌다. 진주 방면에서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중이고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지리산 아랫고을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경호강의 맑은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멀리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고령토 광산이 하얗게 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 국립공원을 끼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지금은 지리산 국립공원관리소의 철저한 관리통제로 인해 지리산 등산로가 한결 깨끗해져서 등산객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9/07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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