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선인들의 절개

■고사전(황보밀 지음/예문서원 펴냄)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성한 귀갑(龜甲)이 있는데 죽은 지 2000년이나 되었으며 수건으로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해지기를 바랬을까요, 아니면 더 살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길 바랬을까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길 바랬겠지요.” “가시오. 나도 지금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고 싶소이다.”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으로 이름 높은 장자가 초나라 위왕이 황금 100냥으로 자신을 신하로 부리려 하자 임금의 사신에게 던진 충고다. 더러운 정치에 뛰어들어 지조를 잃기보다는 깊은 산속에 파묻혀 깨끗하고 기품있는 삶을 살겠다는 장자의 정신이 배어있는 말이다.

고사전은 어지러운 시대에 현실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이름을 보전한 은자(隱者)들의 이야기를 모은 현존하는 최고의 은일전집(隱逸專集)이다. 한말부터 위촉오 삼국시대까지의 난세를 살다 간 황보밀이 지은 이 책은 요(堯)시대의 피의(被衣)로부터 위말(魏末)의 초선(焦先)까지 모두 91 명의 은군자(隱君子)들의 비범한 언행과 일화로 꾸며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가의 시조 노자, 안빈낙도의 대명사 안회, 굴원을 비판한 어부 등 험난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부귀영달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지켜온 선인들의 고고한 정신이 담겨 있다. 책 속에 실린 고사 가운데 39조는 저자가 창작한 것이며 나머지 52조는 장자를 비롯해 사기, 논어, 열자, 맹자 등 여러 고전에서 그대로 옮기거나 혹은 몇 가지를 혼합해서 엮었다.

고사전은 중국 고대 도가문학과 소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문학적 가치도 높다. 책속 고사들의 이야기는 도가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 동시에 위진남북조 시대 소설의 주류였던 지인소설(志人小說)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고사전은 후한서, 일민열전 등 후대 정사(正史)가 은일전(隱逸傳) 부분을 따로 마련하게 할 만큼 중국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처음 한글로 번역한 이 책은 1700 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딱 들어맞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오로지 진정한 도의 추구와 인격 수양을 위해 자신에게 엄격했던 선인들의 처세는 물질과 욕망에 눈먼 현대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빈노부 편. 한나라 환제가 경릉현을 지나칠 무렵 오직 한 노인만이 임금의 행차에는 관심없이 밭을 갈고 있자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신하 장온을 보내 그 연유를 묻는 장면이다.

“묻건대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천자를 세우는 것이오? 아니면 잘 다스려져서 천자를 세우는 것이오? 천자를 세워서 천하의 아비노릇을 하는 것이오? 아니면 천하를 부려서 천자를 받드는 것이오? 옛날 성왕은 띠 풀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에 살았지만 백성은 평안하였소. 지금 당신의 군주는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 자신은 방종하고 질탕한 놀음을 서슴지 않으니, 내가 당신이라면 그것을 부끄러워 할텐데 어찌 사람들에게 그것을 구경하게 한단 말이오?”

한 이름없는 촌노를 내세워 위정자(爲政者)의 도리를 가르친 대목이다. 일반 서민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는 우리의 위정자들에게 정치의 존재 이유를 되새겨 보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선인들의 삶을 엿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임금의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켜가면서 그들에게 뼈아픈 충고도 마다하지 않은 은사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교훈을,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통쾌감을 선사한다.

송기희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9/19 19:13


송기희 주간한국부 bar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