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25)] 도쿠세이(德政)

일본은 지난 수년간 막대한 공적자금을 금융안정과 경기부양을 위해 쏟아부었다. 금융안정을 위한 공적자금의 규모는 70조엔에 이르며 이와 별도로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덜기 위한 정부의 특별보증도 30조엔 규모에 달한다.

야당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을 비롯한 연립여당은 1998년 10월 금융재생법과 금융 조기건전화법을 통과시켜 적극적인 공적자금 투입에 나섰다. 그 덕분인지 1999년 후반기 이래 일본의 금융 불안은 크게 잦아들었고 경기회복 조짐도 완연해졌다.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은 크게 두 가지로 이뤄진다. 금융기관의 도산에 대비해 정부가 예금 원리금 상환을 보장하거나 금융기관에 직접 자금을 주입해 자기 자본을 증강시키는 것이다. 이중 예금자 보호를 위한 자금은 전체의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금융기관의 보호는 금융기관 자체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채무 기업에 대한 지속적 융자를 보장, 기업의 도산을 막으려는 조치다. 소프트뱅크를 비롯한 3사 연합이 인수한 일본채권신용은행(일채은)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한때 국유화했던 이 은행의 부실채권 4조5,000억엔을 매입해주고 3사 연합에 넘겼다. 또 3년내에 채권 가격이 20% 이상 떨어질 경우 그 부실채권도 정부가 매입해 준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이런 좋은 조건으로 일채은을 넘기며 일본 정부가 내건 조건은 기존 거래기업에 대해 융자지속이었다.

야당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적자금 투입에 반대한 것도 최대 수혜자가 금융기관과 기업인 반면 최종부담은 국민이 질 수 밖에 없는 공적자금의 성격 때문이다. 일본 정부·여당은 1980년대 후반의 거품 경제가 대규모 부실채권을 낳았고 그것이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특수상황을 들어 이런 조치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또한 금융기관과 기업의 불안을 방관하다가는 경제 전체가 무너질 현실적 위험성도 커 일본 국민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 특수상황론을 수긍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빚(예금)을 털어주거나 기업의 부채(부실채권)를 탕감해주는 일본 정부의 행태는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다. 가마쿠라(鎌倉)시대 이래 일본에서는 빚을 탕감해주는 ‘도쿠세이’(德政)가 잇따라 이뤄졌다.

말 그대로라면 유교의 이상인 덕치(德治)·인치(仁治)에 따라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관대한 조치를 연상시킨다. 752년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의 완성을 맞아 공적·사적 채무의 감면 조치가 이뤄졌다는 ‘속일본기’(續日本紀)의 기사는 그런 성격의 부채탕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도쿠세이라는 말이 정착된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도쿠세이는 이런 덕치·인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도쿠세이는 1267년 군사정권인 바쿠후(幕府)가 천황령을 빌어 발표한 ‘영지회복령’이다.

이 명령은 쇼군(將軍)과 주종관계를 맺은 쇼군 직속의 무사, 즉 ‘고케닌’(御家人)의 영지에 대해 매매·담보를 금지하는 한편 이미 매매된 영지는 애초의 가격으로 되살 수 있도록 했다. 대단한 특혜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도쿠세이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1273년에 내려진 ‘고케닌 영지회복령’이었다. 고케닌에게 돈을 빌려주고 영지를 담보로 잡고있던 상인 등은 이 조치에 의해 저당잡은 영지를 그냥 내놓아야 했다. 무사의 신분적 안정을 도모, 바쿠후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내 지지기반을 강화하려던 것이었다.

이후 특정계급에 특혜를 주어 환심을 사려는 도쿠세이가 잇따랐다. 또 이를 지켜본 농민들이 부채탕감이나 소작료의 감면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는 ‘도쿠세이 잇키(一揆)’도 빈발했다.

도쿠세이로 무사계급이 주로 수혜자가 됐다면 상인들은 그때마다 엄청난 손실을 겪어야 했다. 도쿠세이의 이런 성격은 공적자금도 마찬가지다. 직접적 수혜자가 금융기관과 기업이라면 과거처럼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피해자는 국민이다.

그래서 공적자금 투입을 지켜보는 많은 일본 국민의 가슴 속에는 오랜 도쿠세이의 역사에서 비롯한 체념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9/2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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