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돌아온 '우리시대의 히피' 한대수

"음악이 없다면 난 영원한 실향민"

세상이 알아준다고 싸움은 끝났는가? 아니다.

한대수(52)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30여년전 앨범 재킷에 빨간 가위표질을 당한 채 이 땅을 떠났던 장발의 사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수 없던 이 땅을 향해 “나를 잊으려면 잊어버리라”며 호방하게 떠났던 그 사내를 이 땅이 다시 불러들였건만 그는 여전히 외로운 떠돌이다.

60~70년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옥의 슬픔’등으로 알려진 가수 겸 작곡가. 그의 ‘멀고 먼 길’은 아직도 그 끝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해가 갑니까? 아직도 저는 음반사에 빌러 다니는 처지입니다. 만나는 레코드사 사장들마다 한결같이 ‘한 선생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정작 ‘합시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데. 어떤 면에선 유신때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쁩니다.

그땐 그래도 진지하게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노래만 좋으면 언젠가는 되겠지, 추상적인 믿음만으로도 서로 격려하며 기다려 주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다들 주판만 튕깁니다. 제가 아는 정말 훌륭한 음악인들중엔 10년동안 아직 솔로판 한번 내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비틀즈를 영웅으로 만든 건 원래 건달, 깡패로 빌빌대던 그들의 음악성에 과감히 투자한 한 레코드가게 주인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제작자들 모두 당장의 히트메이커만 음반을 내겠다고 한다면 앞으로도 제2의 조성모나 베이비복스만 되풀이될 뿐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앨범이 될지도 모르는 8집

그렇다고 그 넋두리에 매몰될 만큼 한대수는 약한가? 그것도 아니다. 그에겐 어쨌든 그의 음악을 듣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팬들이 있었고, 기꺼이 그의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동지도 있었다.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될거라는 8번째 음반작업.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뮤지션 손무현이 합세한 이번 음반은 ‘영원한 고독(Eternal Solo)’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그가 외롭다는건 어쩌면 축복이다. 외로운 인간은 절박하므로, 절박하지 않은 한대수의 음악은 궁극적으로 가짜이므로.

우리 시대의 히피 한대수. 태어나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법적으로는 미국국적을 지닌 뉴욕 시민이다. 아니 음악외엔 돌아갈 곳이 없는 영원한 실향민 한대수.

1948년 부산에서 출생한 그는 미군정때 경남 도지사를 지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이자 신학대 초대학장이었던 할아버지와 서울대 공대 출신의 촉망받는 미국 핵 공학자였던 아버지,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맏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를 두었다.

어려선 항상 집안에 울려퍼지던 바흐나 베토벤, 모차르트 음악. 그러나 일곱 살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그의 고단한 삶이 시작됐다. 갖가지 억측만 돌 뿐 행방을 알 수 없던 아버지.

결국 조부모의 뜻으로 어머니는 새 삶을 찾아 떠나갔고, 한씨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조부모 아래서 보냈다. 10살때 할아버지를 따라 잠시 미국으로 이주, 3년간 살았다. 귀국후엔 경남중고교에 진학, 외로운 학창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FBI며 사립탐정까지 동원해가며 계속 아버지를 찾았다.

우여곡절끝에 17년만에 만난 아버지는 그러나 미국인 여성과 재혼해 철저히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서먹서먹하기만한 아버지와 새어머니곁에서 미국 고등학교에 다녔다.


혼란과 고통속의 50년 노래인생

그러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그는 어디에서나 겉돌았다. 혼란과 고통속에 학교 건달 패거리와 어울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기도 했고, 특이하게도 외국인이면서 반에서 항상 최고였던 영어공부만 빼곤 성적도 엉망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중 상담교사 홀을 만나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노래에 대한 자신의 적성에 눈을 떴다. 베트남 전쟁과 히피운동, 마리화나와 LSD, 부모에 대한 반항이 유행처럼 번지던 당시 미국 사회속에서 그는 시를 쓰고 선술집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방목된 망아지였다.

수의사가 된 한대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고교 졸업후 목장 경영자가 되기를 원하던 조부 뜻을 좇아 한때 대학에서 수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간단한 동물 해부실험조차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 뛰쳐나오고 말았다. 대신 가족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학비며 생활비 지원이 끊어져 버렸다. 가난한 고학생 생활이 시작됐다. 오전엔 사진학교에 다니고 오후엔 새벽 1시까지 주방장 보조일을 하며 월세 50달러의 빈민가 아파트에서 근근히 생활하는 힘겨운 생활이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버스비도 쓸 수 없었다. 몰골은 갈수록 거지꼴로 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지만 전쟁과 혼돈으로 흔들리던 당시 미국사회는 그에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못했다. 간신히 한 스튜디오에 취직했지만 밥값도 되지 않는 수입이었다. 매일 커피숍에 죽치고 앉아 누군가 자리를 뜰 때마다 그가 남기고 간 토스트나 달걀 찌꺼기를 재빨리 먹어치우며 끼니를 떼우곤 했다.

유일한 희망은 음악이었다. 1960년대 말은 바로 음악의 혁명기. 딜런과 도노반, 핸드릭스와 클랩튼, 비틀즈,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계의 일대 지진이 젊은이들을 열광케하던 때였다. 그 열기의 현장에 그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음악에 빠진 채 짐승처럼 피폐하게 살아가는, 광기만이 살아 있는 청년. 그 우울한 빈민가에서 그를 구해낸건 어려서 헤어졌던 친어머니였다.


뉴욕에서 온 괴물

1968년, 산발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온 몸에 쾌쾌한 냄새를 진동하며 그는 서울의 친어머니곁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원한 것은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당시 무교동에 있던 다방 ‘쎄시봉’을 찾아가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정식 음악교육 한번 받은 일이 없는, 이 뉴욕의 ‘괴물’은 금새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특히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트로트 가수들이 주류를 이룬 그 당시 한씨가 들고 나온 음악은 그들에게 자못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별도의 작사가나 작곡가 없이 직접 자작곡을 부르는 가수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송창식과 김민기 등 하나둘씩 자작곡을 부르는 가수들이 등장, 소위 ‘통기타 세대’가 이루어졌다. TV에도 출연, 연이어 섭외가 밀려들만큼 주목받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아들이 부끄러워 눈물을 쏟았다. 노래를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입을 막은 건 유신정부였다. 그의 노래가 운동권 학생들의 데모가로 애용되는 등, 반정부를 선동한다는 빌미였다. 항변도 소용없었다. 인간 한대수의 한과 슬픔, 운명에 대한 반항이 하필 당시 시대 상황과 중첩되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음악활동이 막힌 뒤 생활을 위해 한국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직, 광고 사진을 찍으며 살았다. 해군 제대후 한 영문일간지 사진기자로도 근무했다. 1집 앨범 ‘멀고 먼 길’에 뒤이어 2집 ‘고무신’을 냈는데, 이것이 심의에 걸렸다.

‘물 좀 주소’라는 노래가 중앙정보부의 물고문을 암시한다는 것을 비롯해 그의 노래 대부분이 체제전복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며 문공부가 1집 앨범까지 모두 소급, 판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시중에 풀린 앨범은 모두 몰수당했고, 마스터 테입까지 내놓았다.

어느날 같은 신문사 정치부 기자 두명이 ‘남산호텔’로 불려갔다가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것을 본 뒤엔 편집증과 망상의 증세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경찰을 보거나 낯선 사람이 전화만 해도 공포에 질리던 27세의 어느날,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났다.

미국생활은 한동안 평온한 듯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졌고, 시가 있었고, 사진작가로서의 안정된 삶이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이름은 버렸어도 음악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진작업 중에도 악상이 떠오르면 급히 악보부터 그렸던 한씨.

음악이 없었더라면 이후 그가 겪은 사랑의 상처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40세 무렵 20년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와 이혼, 그 고통속에서 앨범 ‘무한대’를 만들었다. 14년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였다. 이후 몽골계 러시아인 여성 옥산나와 사랑에 빠졌고, 두 번째의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안정을 찾고 살아가던 그에게 1997년 2월 느닷없이 일본 후쿠오카 공연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무대에 선지 20년이나 지난 그를 어떻게 그들이 기억해냈을까. ‘한국대표’로 초청한다는 말에 ‘내가 왜 대표냐, 나보다 더 훌륭한 대가들이 한국에 더 많다’며 사양하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일본 락의 여왕으로 불리는 대스타 카르멘 마키를 내세운 공연팀에선 집요하게 그를 원했다. 김도균, 이우창과 팀을 구성해 7개월간 연습,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일본공연으로 다시 떠오른 ‘한대수’

일본 공연의 파장은 곧바로 한국으로 되이어졌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이름 한대수가 다시금 국내에서 불려지기 시작했다.

그를 기다려 온 올드팬들뿐만 아니라 60,70년대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10대, 20대 음악팬에게까지 반향을 일으키는, 제2의 한대수 파장을 일으켰다. 97년부터 오늘까지 크고 작은 국내 콘서트에 꾸준히 등장, 최근엔 자서전 ‘사는것도 제기랄, 죽는것도 제기랄’을 내면서 거의 격변기 대하드라마 수준의 자신의 삶을 털어놓기도 했다.

“저도 이젠 변해갑니다. 10대 20대때는 오직 순수한 열정에 불 타 세상을 향해 화도 내고 반항도 했지만, 내 자신 인생을 살면서 역시 많은 실수를 했고 인생의 아픔, 사랑의 쓴맛 단맛 다 보았는데 이제 내가 누구를 욕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래선지 이젠 날카로운 비판보다는 우리의 상처 얘기,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같은 그런 노래들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늘 다른 음악을 원하는 건 여전히 같습니다. 실험정신이 없는 음악은 내게 죽은 음악이니까. 이번에 만들 음반도 들어보시면 아주 재미있을겁니다. 일정한 장르도 없고, ‘옥의 슬픔’도 유로 댄스로 한번 바꿔볼 작정입니다. 3.5초란 노래도 재미있을겁니다.

3.5초란건 절대의 무아지경을 말하는데, 말하자면 섹스때 절정의 극치감이 지속되는 시간이 3.5초쯤 가거든요. 그땐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는, 선(禪)에서 말하는 그런 무아지경같은 겁니다. 네? 음악의 쾌감은 그럼 얼마나 가냐구요? 아무래도 3.5초보단 한참 더 긴 것 같던데요, 한참 더. (웃음)”

추석이 지난 며칠 뒤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난 한씨. 녹음작업중이던 그는 정말 흥분돼 보였다. 압구정동 한 카페에 앉아 ‘화폐’를 말하고, 추석날엔 송편 하나 못 먹어본 채 떠돌이처럼 이사만 다녔다며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꺼내던 며칠전 전화통화중의 그와는 어딘가 달랐다.

태풍 사오마이 때문인지 다소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에도 민소매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건 최연장자인 한씨뿐이었다. 그런 그가 이윽고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잠자기가 무서워. 나는 일어나기가 무서워. 밖에 나가기도 무서워. 집에 있는 것도 무서워. paranoia. paranoia…”틈만 생기면 한 마디라도 더 물어보려는게 글쟁이의 강박관념이지만, 그날은 조용히 입을 봉한 채 연습장면만 지켜보았다. 열마디를 물어본들 무엇하랴. 그 심상치않은 노래가 대체 그의 뇌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작 중요한 정보는 하느님 외에 알 길이 없는데.


기막힌 '한지붕 3인' 부부

여기 한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몇 년전 이혼의 상처를 딛고 현재 새 아내와 단란한 생활을 꾸리고 있는 중년이다. 그런데 어느 귀가길에서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수척해진 전 아내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의 재혼은 행복하지 않았고 결국 홀로 나와 살며 병까지 얻었다는 걸 주위에서 들어 알고 있다. 이젠 남남이라곤 하지만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그녀에 대한 책임감과 안타까움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더구나 그곳은 외국.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최소한 그녀의 병이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의 아내에게 상처주는 일을 해서도 안된다. 한발 한발 힘겹게 걸어오는 전처. 당신이 그 남자라면 어떻게 할까?

이것은 한대수의 실제상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일단 그 자리를 말없이 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현재의 아내 옥산나에게 조심스레 그녀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이리 데려와야 해요. 당신과 2년밖에 안 산 나도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20년이나 당신과 함께 한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아요! 어서 데려오기로 해요.”

그후 그들은 오늘까지도 나란히 셋이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한지붕 3인 부부’의 결혼생활이 6년째 지속되고 있다. 셋이 함께 뉴욕거리를 걸으며 수다를 떨거나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 받는 일도 그들에겐 익숙한 일상이다.

바깥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 그들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들 나름의 질서와 확고한 사랑의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관습이니 전통이니 하는 단순히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는 이유로 똑같이 따라야만 한다는 게 오히려 이해가 가지않는다’는 입장이다.

“세사람 공통의 관심사는 오로지 각자 자신의 인생에 열중하며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인생에 한두번 밖에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건 아주 짧은 동안이니까. 질투나 악의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 ”고 한씨는 말한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류효진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09/20 21:1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