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카페(25)] 먹는 플라스틱

“플라스틱 2정을 복용하십시오.” 응? 플라스틱을 먹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병마와 싸우기 위해 우리는 플라스틱 알약을 먹어야 한다.

칫솔, 신용카드, 볼펜, 컴퓨터, 가구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플라스틱(또는 폴리머)은 가볍고 내구성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간간이 환경문제로 대두되는 흠만 빼면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다.

그런데 최근 이 플라스틱을 약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먹는 플라스틱, 새로운 혁명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룻거스 대학의 화학과 교수 카틴 울리히(Kathryn Uhrich) 박사는 보다 안전하고 효능 있는 진통제로 ‘플라스틱 아스피린’을 개발중에 있다. 지금까지 플라스틱은 약을 체내에서 수송하는 운반체로 사용되기는 했으나 그 자체를 약으로 사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폴리아스피린 엔 트레이드’(PolyAspirin & Trade)라는 이름의 이 약은 100개의 분자가 사슬로 연결된 구조다. 이 약은 장염에서 폐결핵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아스피린은 독일의 배이어 엔 코사(社)가 발명한 약으로 1900년까지 세계 최고의 매출을 자랑했다. 아스피린(acetylsalicylic acid)의 다양한 효능은 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있을 정도로 다재다능하다.

초기에는 두통과 관절염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심장마비와 발작의 예방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암과 알츠하이머병도 다스릴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스피린은 동시에 결점 투성이다. 위장에 들어가면 활성요소인 살리실산으로 분해되는데 위장의 표면은 이 물질에 민감하기 때문에 장기복용할 경우 위출혈과 위궤양이 발생한다.

울리히 박사에 따르면 플라스틱 아스피린의 구조는 위장의 산성 환경에서는 살아남고 알칼리 환경인 내장에서만 살리실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되기 때문에 적은 양을 가끔 복용해도 충분한 약효를 볼 수 있다. 또 위장의 통증을 비롯한 일반적인 아스피린의 부작용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이 폴리머로 다른 여러 가지 약을 합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2년 이내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플라스틱 아스피린을 먹은 쥐는 그렇지 않은 쥐보다 뼈의 성장이 37%나 잘 돼 플라스틱이 치과나 정형외과용 및 둔부 이식수술후의 환자치료에도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연구진은 이외에도 폐결핵 치료제인 파라아미노살리실산이 위장의 통증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이 약의 플라스틱 버전을 만들고 있다. 또한 시간에 맞춰서 약을 투여할 수 있는 플라스틱 항생제와 녹으면서 항염제를 방출하는 외과용 플라스틱 ‘봉합 실(줄)’도 연구중이다.

질병은 무엇보다도 예방이 최선이다. 그래서 파리 잡는 ‘끈끈이 종이’와 같은 시스템을 분자 수준에서 만들어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잡아 무력화시키는 방법도 고안되고 있다.

미시간 대학의 로시타 에스팬드(Roseita Esfand) 박사는 살리실산(대부분의 세포 표면에서 발견되는 바이러스 부착부위)으로 둘러싸인 가짜 세포 또는 나노-미끼(nano-decoy)를 이용, 바이러스를 화학적으로 공격한 다음 바이러스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약으로 체내에 투여할 수도 있고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의 예방수단으로 그 활용가치가 높다. 실험실의 배양실험에서 나노미끼는 독감 바이러스의 감염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고 한다.

합성(또는 인공)분자에 대한 연구가 깊이를 더해 가면서 이제는 플라스틱이 질병 방어의 표준 무기가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21세기 과학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원근 과학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입력시간 2000/09/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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