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비주류 '반창(反昌)연대'

5.30 전당대회 이후 숨죽여오던 한나라당 비주류들이 모처럼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이들에게 동인을 제공한 것은 7월24일 민주당의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 이후 가파르게 전개되어오던 여야의 대치정국.

이회창 총재와 측근들이 주도해온 강경일변도의 투쟁노선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주류들은 주류측의 투쟁론에 맞서 국회등원론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주류 “이총재 사당화 되고있다”날 세워

지난 총선의 공천과정에서 계파 수장이 대거 숙청되고 총선 직후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이회창 총재 중심의 당체제가 굳어지면서 한나라당 내에서 비주류는 설 땅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총재단회의 등 주요 의사결정과정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등 활동이 정지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반면 이 총재는 꾸준하게 당운영 전반을 장악한채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했다.

이 총재가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사건 이후 네 차례나 장외집회를 여는 등 대여 강경노선을 고집했던 것도 당 내부적으로는 리더십 강화를 노린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경노선이 오히려 비주류에게 활동공간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더이상 국회를 외면할 수 없으므로 국회에 등원해야 한다”는 당내 일부 의견을 반영해 등원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박근혜 부총재와 김덕룡 손학규 의원 등 비주류 세력은 부산 장외집회가 끝난 다음날인 9월22일 회동을 갖고 당내에서 조심스럽게 거론되던 국회등원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날 회동은 전당대회 이후 처음으로 비주류가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더구나 이들은 한결같이 앞으로도 자주 모임을 가질 것이라며 미래를 기약했다.

이들은 모임에서 “민주당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이듯 우리 당도 이 총재 개인의 사당이 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무조건 국회 등원과 장외투쟁 반대, 당언로 활성화 등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은 또 당의 언로를 트기 위해 앞으로 종종 만나 당의 진로에 대해 의논하고 의견을 개진키로 했다. 이들은 사실 이번 회동 이전부터 정중동의 행보를 통해 나름의 입지를 찾아오고 있었다.


김덕룡·박근혜·손학규, 연대 지속여부 관심

비주류 원조격인 김덕룡 의원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이 총재에게 패했으나 20% 대의 지지율을 확보했으며 최근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탈당설이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김 의원의 계보로 분류되던 의원이 대부분 이 총재 쪽으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김 의원 스스로도 “누가 만든 당인데 나가느냐”고 되묻고 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대중적 인기가 높은 박근혜 부총재는 최근 김윤환 민국당 대표를 만나데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 방문설이 나오는 등 차기 대권을 겨냥한 듯한 행보를 하고 있다.

특히 영남 주도의 정치지역 연대론을 주장하고 있는 김윤환 대표가 박 부총재의 정치적 이미지를 차기대권 구상에 활용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박 부총재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다.

손학규 의원은 한나라당을 제외한 야권 내에서 이회창 총재의 대안 중 하나로 거론되어온 인물.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윤환 대표가 손 의원을 공동지지하면 차기대권 구도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역시 박근혜 부총재. 박 부총재는 회동이후인 9월27일 당 공식회의인 총재단회의에서 비주류의 등원론 주장을 공격한 김기배 사무총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등 독자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회의석상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박 부총재는 이날 회의 시작에 앞서 “갑자기 김 총장의 발언은 경선으로 선출된 부총재를 우습게 아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부총재는 21일의 부산집회에 이어 29일 대구집회에도 불참, 이 총재와의 거리를 분명히 했다.

이 총재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집요한 참여권유에도 불구하고 박 부총재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죽기살기식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소신”이라며 끝내 집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박 부총재는 또 기자들에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로 ‘마이웨이’에 나설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관심은 나름대로 여론의 명분을 타고 있는 등원론을 매개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비주류의 행보가 집단화, 연속화할 수 있을지 여부에 모아진다. 지금으로선 회의론이 많다. 당장 박 부총재와 김, 손 의원의 정치 성향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지속적 연대가 힘든데다 당내에서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그 근거다.

그러나 이들이 사안별로 연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총재 비주류껴안기에 전력

비주류의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되자 그동안 “더이상 비주류는 없다”고 공공연하게 장담해오던 주류측은 당혹감 속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한 대응방안처럼 무관심 전략을 사용하자는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체적인 기조는 포용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대선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서 어쨌든 껴안고 가야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점에서 이 총재가 29일 손학규 의원과 점심회동을 가진 것은 나름대로 음미해볼만한 대목이다. 5월 전당대회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손 의원을 만난 것 자체가 앞으로 이 총재의 적극적인 비주류 껴안기 전략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또 박 부총재에 대해서도 추가로 설치될 각종 특위의 위원장 자리를 제안하는 등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고 있다.

이 총재가 이처럼 비주류 포용전략에 나서고 있는 것은 자칫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경우 ‘9룡(龍)’이 난립하며 당이 어지러워졌던 1997년 대선 때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대선이 2년6개월이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마저 없는 이 총재의 일방독주 상황은 오히려 대권가도에 부정적이라는 판단도 한 것 같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비주류에게 적당한 활동공간을 준다면 오히려 당이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는 예방주사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다만 주류가 지속적으로 이슈선점을 함으로써 비주류의 목소리가 당내에서 공감을 얻지못하도록 적당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천호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05 10:14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