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26)] 웅천(上)

조선왕국 최초방문자 세스뻬데스 종군신부와 웅천성

추석명절에 한반도 전역을 강타한 태풍 사오마이는 사바세계의 사랑과 슬픔, 노여움까지 모두를 삼켜버렸다. 자연은 오만할대로 오만해진 인간세상에 겸손과 참회의 메시지를 태풍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아직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경남 남부해안에 위치한 웅천항에도 태풍 사오마이가 남긴 상처는 처참했다. 서울에서 김해공항에 도착한 향토미각연구가 김용산 선생과 IMF위기의 시련을 딛고 재기에 몸부림치고 있는 김곤양 사장이 웅천가마터 기행에 동행했다.

우선 시장기를 때우고져 김용산 선생의 안내로 부산 구포의 할매 제첩국집에서 맛있게 점심을 하고 낙동강 하구언을 따라 웅천쪽으로 향했다. 곳곳의 황금들판은 무참히 쓰러져버렸고 해안가 횟집의 천막은 갈기갈기 찢어져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해 동행한 일행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재앙은 왜 하필이면 가난한 자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버리는가”라고. 지금은 부산과 진해만 사이에 조그만 어촌인 웅천으로 쇠락해버렸지만 15세기에는 조선왕국의 대일외교와 무역의 교섭창구인 3포중의 한 곳인 제포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웅천제포지도는 “항시 거주하는 왜호(倭戶) 308호의 인구는 남녀노소 합쳐서 1722명, 절이 11군데”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포에 삼포중에 가장 큰 규모의 일본인 마을이 있었던 것은 일본의 스시마와 왕래가 가장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제포를 통해 조선왕국의 선진문물을 무로마치 막부에 전파시켰는데 그중에는 대장경과 찻그릇도 포함돼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개전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제포 즉, 웅천성에 주둔하게 된다.

조선왕국은 임란을 통해 서양의 특별한 한 종군사제와의 만남이 있다.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조선왕국은 서양에 재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서양인에게는 막연하게 야만인 탈탈족의 섬나라로만 알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인은 직접 조선을 방문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임란을 계기로 조선왕국의 실상이 정확하게 예수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로마의 예수회 본부에 보내는 `1592년 일본예수회연례보고서'를 기술하여 임란의 발발배경과 전쟁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서양에 알렸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스페인사람 그레고리오 세스뻬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고니시의 요청에 의해 웅천성에 종군하게 된다. 그는 1551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시장아들로 태어나 예수회 소속 신부로 동방전교의 목적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다.

그는 조선에 종군하면서 서양인으로 유일하게 임란을 목격하면서 1년동안의 상황을 소상하게 서간문으로 남겼다. 그는 웅천성의 고니시 진중에 머물면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장군이나 병사에게 고해성사를 해주었다. 그후 그는 이곳 웅천 가마터의 어린이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신학교에 입학시켜 훌륭한 사제로 길렀다고 한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0/05 11:2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