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적대국 군부 실력자의 백악관 방문

찬바람이 돌면서 워싱턴 시내의 나뭇잎도 단풍이 들려하는 가을이 되었다. 늘 그렇듯 이맘 때면 주변에 알고 지냈던 사람과 모여 야유회 등 모임을 가지곤 한다.

아마도 이국 땅에서 살다보니 여러가지 인연을 따라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에서는 벌써 얼마 남지 않은 한해가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가끔씩 야외 모임을 가지곤 한다.

지난 주말에도 그러한 모임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모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당수 사람이 참가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북한의 군부 실력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으로 미 대통령을 방문하러 오게 되자 몇몇 사람은 워싱턴 초추(初秋)의 주말이 주는 여유로움도 즐기지 못한 채 업무에 전념하는 바람에 나머지 회원은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워싱턴에는 우리에게 매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반세기 전 서로 총칼을 들고 싸우던 적대국 북한의 군부 실력자가 “철천지 원쑤”라고 타도를 외치던 제국주의자 미국을 방문, 대통령을 관저로 찾아간 것이다.

더구나 그 실력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으로 김 위원장의 친서를 미 대통령에 전달했다고 한다. 지난 세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번 방문을 통해 어떠한 가시적 결과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지만 한반도 문제의 한 당사자인 북한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군사적 긴장이 하루빨리 해소되었으면 하는 것이 조그만 바램이다.

잘 알다시피 금년 들어와서 한반도의 역학관계는 급속도로 변화되었다. 지난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활발해진 남북한의 상호교류는 이미 여러가지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국내외 동포에게 많은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적어도 대다수 미국인은 한반도 문제에 그리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설사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금년에 일어난 일련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 호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냉소적 반응이 많다.

예를 들어 사무실의 동료만 하더라도 한반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너무나 급작스런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미심쩍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즉, 언제 북한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변화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의견이다. 이와 함께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보도를 통해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도 있을 정도다.

북한 실력자의 미국 방문을 통하여 미국인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 북한은 북한을 알고 있는 미국민에게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성국'이며 `테러지원국으로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의 UN총회 참석을 위한 뉴욕 방문도 항공사 직원의 해프닝으로 무산되고 만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군부 실력자의 이번 워싱턴 방문에는 국무부 직원이 직접 기내영접까지 나가며 의전에 신경을 쓴 것으로 안다.

테러지원국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함으로써 북한이 받는 경제적 불이익은 엄청나다. 간단한 예로 북한으로 386급 이상의 컴퓨터는 수출하지 못하도록 돼있다.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미국 관리들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통일이 언제쯤 될 것이냐”고 개인적으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때 김 위원장은 “통일은 됑m 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일단 북한이 남북간의 교류를 통하여 사회를 개방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마음을 먹었다면 하루속히 미국인의 인식부터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싫든 좋든 미국은 아직도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내년 봄의 모임에는 또 누가 갑작스레 무슨 일이 생겨 참석 못하게 될지 궁금하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10/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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