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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노벨상 수상] 한민족의 긍지를 떨친 쾌거

인권·평화·통일 향한 신념의 50년 정치역정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우리 민족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4대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한반도는 작은 땅덩어리에도 불구하고 50여년간 남북으로 갈라져 사상과 이념의 치열한 대립을 펼쳐왔다.

남한만 해도 30년이 넘는 군사 독재정권과의 기나긴 투쟁을 벌여왔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OECD 가입이라는 정치ㆍ경제적 진보가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IMF위기라는 환란에 빠져 국가파산의 위기상황까지 몰리기도 했다.

따라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은 김 대통령 개인의 영광을 넘어 한민족이 정치ㆍ경제적 안정을 통해 인류 보편적 가치인 세계평화와 화해의 선도 대열에 합류 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역경 이겨낸 인동초

김 대통령이 6개 분야의 노벨상 가운데서도 가장 권위가 있다는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그가 정치역정 50여년간 `인권', `평화', `통일'이라는 신념을 꿋꿋히 실천해온 결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12월3일 전남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소작농이었던 김운식씨의 네 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 출마를 시작으로, 1997년 제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야당 정치인으로 초지일관하며 민주화투쟁의 맨 앞 자리에 서 있었다.

김 대통령은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 선생이 조직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1956년 장면 박사의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 건준 활동 전력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던 `색깔론'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5대 보궐 선거에 이어 6대 총선때 고향 목포에서 당선되면서 국회에 발을 내디딘 그는 본회의 최다 발언과 최장시간 발언 등 발군의 의정활동으로 주목받았다. 1967년 7대 총선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낙선운동을 폈지만 오히려 그는 야당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때부터 이철승 김영삼씨와 함께 1970년대 `40대 기수론'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1971년 대선에선 46%의 지지를 얻어 100만 표 차이로 군사독재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지만 이때부터 박정권의 눈엣가시가 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국회의원 유세 도중 트럭사고를 위장한 암살 기도로 다리를 다쳐 고관절 장애를 입었고 유신철폐를 주장하다 1973년 여름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 납치돼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76년 `명동 3ㆍ1 구국선언'으로 3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전두환 전대통령이 집권했던 1980년 광주항쟁 때는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꿋꿋하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 등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가 `옥중서신'으로 출간돼 민주화 운동의 지침서가 되었다. 2년여간의 수감생활중 탐독한 수많은 서적은 민주화와 인권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지를 더욱 견실히 하는 이론적 기반이 됐다.

그의 인권운동은 민주화 투쟁의 또다른 축이었다. “힘이라는 것은 약자를 돕고 정의를 위해서 바칠 때만 아름다운 것이고 의로운 것이다”라는 평소 신념은 그의 내면 세계를 지배하는 기준이었다.

국제 여론과 미국 등 다른 민주국가의 압력 덕에 특별감형돼 미국 망명길에 오른 그는 한국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워싱턴에 `한국 인권문제 연구소'를 개설했으며 하버드대 국제문제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그니노 아키노 전상원의원과 함께 아시아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 이후 14전 15기

김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서 40.3%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세계를 향해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던졌다. 1998년 세계 인권선언 50주년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 좌우명이었던 세계 평화공동체에 대한 의지를 만방에 밝혔다. 이런 일련의 행동으로 김 대통령은 이미 여러차례 권위 있는 인권상을 수상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필라델피아의 실업가 모임인 필라델피아협회가 억압 무지 빈곤으로부터 자유를 신장시킨 지도자나 단체에게 수여하는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상했다.

이 상은 1989년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이 첫 수상자며 지미 카터 전대통령(1990년), 오스카 아리아스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국경없는 의사회'(1991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1993년) 등이 수상한 바 있다.

또 지난해에는 노르웨이 베르겐에 본부를 둔 라프토(RAFTO) 인권재단으로부터 `라프토 인권상'을 받았다. 이 상도 체코의 하예크 외무장관, 아웅산 수지 미얀마 야당 지도자, 동티모르 국민, 체첸 반전운동단체 등이 받은 권위 있는 상이다.

라프토 인권상과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자는 보통 2~3년 뒤에 노벨 평화상을 받는 예가 많아 지난해부터 “다음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었다.

김 대통령의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은 14전15기의 쾌거다. 김 대통령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군부독재 말기 국민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독 사민당 의원을 통해 처음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당시 김 대통령은 상당히 유력한 수상후보였으나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탓에 수상에서 제외됐다.

이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여권 인사는 “당시 노벨 위원회 사람들이 `DJ가 YS에게 후보를 양보했더라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김 대통령은 해외 인사에 의해 한해도 거르지 않고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매번 막판에 좌절을 맛봐야 했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1993년 그는 처조카인 이영작 박사의 도움으로 후보로 추천돼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장,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지만 아쉽게 순위에서 밀려났다.


대북 햇볕정책, 인권운동에 높은 점수

13차례의 고배를 마신 김대통령이 노벨상에 한층 다가서게 된 것은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다. 김 대통령은 정권에 오른 뒤부터 내적으로는 흔들림 없는 대북 햇볕 정책을 밀어가고 외적으로는 국제 정상회의가 있을 때 마다 동티모르 사태 등 세계 인권과 평화에 대한 각국의 동참을 호소하며 자신의 뜻을 펼쳐나갔다.

그로 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을 개방의 장(場)으로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평양 방문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것이 이번 평화상 수상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김 대통령의 수상에는 아태재단 고문으로 있는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 등이 추천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사실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동수상 여부도 관심을 끌었다. 마지막 냉전 지대였던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조성된 데는 김 대통령 외에도 김정일 위원장의 역할도 상당부분 있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클린턴 미 대통령을 방북토록 초청한 바 있어 수상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더구나 19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등 분쟁 지역의 쌍방이 공동 수상한 전례가 있어 더욱 기대치가 높았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간 14차례나 후보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인권 향상과 민주주의, 아시아 평화 등 다각적인 방면에 기여가 높았던 반면 김 위원장은 남북회담 외에는 이렇다 할 공적이 없었다.

더구나 북한이 아직 테러국가의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데다 국제 인권단체에서 아직 북한 주민의 인권이 제한돼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동격에 놓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심사위원 사이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튼 김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남한과 북한, 여당과 야당, 영남과 호남을 떠나 한민족의 긍지를 세계에 떨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동북아시아 끝에 있는 분쟁 지역이었던 한반도가 이제는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준 것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에는 진정한 원로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없었다. 무역 규모에서는 세계 10위권을 바라보면서도 정작 세계적으로 인정해주는 지도자 한명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땅에도 세계인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원로 지도자의 탄생을 보게 될 날이 다가온 것이다.


①1943년 목포상고 시절

②1973년 도쿄납치사건 뒤 가까스로 살아나온 김대통령이 동교동 자택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③김대중태통령은 3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면서 더욱 거센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④198년 신군부에 의해 군사재판을 받는 김대중대통령.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0/10/17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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