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12년 민요방송외길, MBC 최상일 PD

"가면 갈수록 깊이 빠지는게 우리소리"

내게 축하하지 말라. `군번'이 `군번'이라 CP가 되긴 했지만, 승진 3주도 지나지 않아 벌써 갑갑증이 도진다. 오늘은 강원도 산골의 감나무까지 눈앞에 아른거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면 하룻밤 자고 가라고 붙들 어르신들이 한 둘이 아니다. 딸 손이 없어 버려둔 감나무 감도 신나게 따드리고, 이 여의도 빌딩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천지로 널렸다. 나는 아무래도 머리보단 몸으로 부대끼며 일하는 게 맘에 드는 점퍼 체질이다.

내 나이 마흔 셋. `민요전문 PD 최상일'로 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민요방송만 12년, 그것도 정통 민요 프로그램으로 3사중 최장수를 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욱이 이건 천덕꾸러기 프로그램도 아니다. 오히려 MBC가 자랑하는 효자 상품이다. 라디오로선 드물게도 1995년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고, 현지에서 녹음한 구전민요 1만여곡은 총 103장의 CD로도 제작돼 그 일부가 학계와 유네스코, 박물관 등지에 자료로 나가있다.

1분짜리 스파트 `우리 소리를 찾아서'만 해도 외부 협찬까지 업은 인기 프로그램. 뭣보다 우리 민속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긍지가 내겐 있다.


구전민요 발굴은 평생의 업

웬만큼 큰 상도 받았고, 그만하면 지루할 때도 되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 가면 갈수록 더 깊이 빠진다. 처음엔 필요에 의해 시작했지만 이젠 내 스스로 좋아서 놓지 못한다. 퇴직한 후에도 이 길만 가기로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간에 겪은 얘기는 밤새도록 해도 모자란다. 1989년 처음 이 구전민요 프로젝트가 시작됐을 때, `맨땅에 헤딩'이 따로 없었다.

대체 어디 뭐가 있는 지를 알고 찾는단 소린가. 막막한 심정으로, 전국의 동네 이장들에게 설문지부터 돌렸다. 전래 민요 가창자의 연락처를 묻는 내용으로 3만부. 그러나 회수된 것은 고작 1만부 정도에 불과했다.

겨우 수배한 연락처를 들고 소리꾼을 찾아가면 `그건 뭣에 쓰려고 그러냐'며 되묻기만 했다. 대부분 70대 이상 연로한 할아버지과 얘기를 하자니 바짝바짝 땀만 나고 시간만 흘렀다. 차차 요령이 생겼다.

요즘 같으면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라도 전화로 단 5분만에 얘기는 물론 노래까지 듣고 끊을 자신이 있다. 실제로 동료들간에 내기를 한 적도 있다. 어떤 요령? `어르신같은 분이 문화재지, 문화재가 따로 있겠습니까.'로 시작해 농사짓는 얘기, 살아가는 얘기로 풀어간다. 그러자면 농촌 일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둬야 한다.

답사후 정식으로 녹음장비를 갖추고 찾아가는 날은 환영도 그런 환영이 없다. 완전히 동네 잔칫날이다.

우리쪽에선 PD와 국악 강사들, 엔지니어 등 스태프가 모여서 고성능 녹음장비에다 노인들께 대접할 술과 안주까지 꼼꼼히 챙겨간다. 가보면 마을은 마을대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이장이 동네 스피커로 방송을 하며 `오늘 아무개 취재팀이 찾아오니 소리꾼은 아무개 댁으로 집결하고, 부녀회에선 식사를 준비하라'고 진두지휘한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침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와 마이크 앞에서 민요를 부르는데, 그럴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녹음이 끝나고 나면 다음에 또 오라고 신신당부까지 한다.

그런 식으로 1개 군 지역의 채록을 마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1주일. 전국 139개군 904개 마을을 다 돌고 나자 8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참여한 PD만 총 10명. 논고르기, 노매기, 벌채, 상여소리 등 곳곳에 묻혀있던 1만 4,000여곡의 민요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처음엔 흥이 나 시작했던 이 `반 유랑생활'도 시간이 지나자 다들 힘들어 했다. 지친 PD들은 2년마다 교체돼 나갔다. 그중 끝까지 남은 건 나 혼자였다. 나는 여전히 그 일이 좋았기 때문이다.


반 유랑생활, 아내 아들에 미안

물론 나라고 전혀 싫은 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잦은 출장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1년의 절반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내는 전적으로 나를 이해해줬지만, 네 살바기 아들은 애비 얼굴조차 익히지 못했다. 조금 친해질 만하면 또다시 출장,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나를 말 그대로 '소 닭 보듯' 멀찍이 쳐다보기만 했다.

현장에서 아찔했던 적도 많다. 가장 불안한 건 방송장비였다.

특히 언제 바닥날지 모르는 배터리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얼마전엔 타방송사에서도 소개된 적이 없는 현지 무당굿을 운좋게도 단독촬영할 기회를 잡았는데, 그 역사적인 촬영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이런 염병할!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 배터리 노이로제 때문에 `나 죽거든 빵빵하게 충전한 신형 배터리나 몇 개 내 머리맡에 꼭 넣어달라'고 농담삼아 동료들에게 유언까지 남겼다.

험한 길의 오지만 골라 다니다 보니 자동차도 제 수명대로 갈 리가 없었다. 뭣보다 운전도중 아무데서나 고장이라도 나면 속수무책. 그 바람에 직접 응급처치를 익히다 보니 이젠 자동차 박사가 다 됐다. 웬만한 자동차 고장은 직접 고칠뿐 아니라, 방송국내 고장난 녹음기, 배터리 문제까지 내게 싸들고 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다 이만큼 민요로 깊이 들어오게 됐을까. 어쩌면 내 어린시절에도 조금은 단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시골출신. 어릴 적엔 거머리에 뜯겨가며 농사를 거들던 기억도 있다. 시계포를 운영하며 꽹과리도 멋드러지게 칠 줄 알던 아버지는 특히 내 마음의 우상이었다.

마을 축제 때만 되면 초청을 받아 꽹과리 장단을 선보이셨고, 어느 밤 달빛아래 벌어진 마을 사람들의 줄다리기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버지였다. 정말 충격처럼 다가온, 일대 장관이었다. 우리 소리가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런 영향때문일지 모른다.


대학 `농활'서 듣던 민요 아직도 기억에

서울대 사회학과 76학번. 유신 막바지의 암흑기에 나는 대학을 다녔다.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순탄치 않았다.

반정부 구호 한마디만 외쳐도 잡혀가던 그 시절에 나는 제적과 복학을 거쳐 간신히 졸업장을 손에 쥔, 소위 운동권이었다. 그 때만해도 지금보단 더 많은 민요가 삶 가까이 있었다.

언젠가 농활을 갔을 때 깜빡 논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슴프레 어느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깼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직하지만 가슴 깊이 울리던 소리, 그게 `강원도 아라리'였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졸업후 MBC PD로 입사했지만 수습기간이 끝나자 엉뚱하게도 관리직 발령이 떨어졌다. 운동권 출신이란 전력 때문이었다. 레코드실에서 음반을 관리하면서 2년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PD로 돌아가 맡은 것이 FM 음악프로그램이었다, 팝송과 가요,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프로그램을 맡았고, 즐겁게 일했다. TV의 시청률만큼이나 라디오 PD들을 괴롭히는 건 청취율 전쟁. 한때 `가정음악실'로 타방송사와 접전이 붙었을 땐 밤새 음악책을 독파해가며 분투한 끝에 보란듯이 경쟁사를 누르고 통쾌해 했던 적도 있다.

언론탄압이 극심하던 5공시절엔 몇 번이나 일을 그만 둘 생각도 했다. 낙하산 인사에다 작가, 진행자, 선곡, 출연자 문제까지 외압에 시달렸고, 청와대에서 긴급투하한 어떤 여성은 갑자기 TV의 단독뉴스 코너를 맡는가 싶더니 이내 FM 라디오까지 밀고 들어오는 현실이었다. 회의가 들었다.

도무지 마음을 붙일 수가 없어 틈만 나면 미친 듯이 산행에 몰두했다. 그렇게 시작된 등산 취미로 오늘까지 전국에 안 가본 산이 없다. 설악산만 서른번 이상 올라가봤고 당장 지도로 그리라고 해도 샅샅이 그릴 수 있다.

1987년 6.29선언후 노조가 만들어졌을땐 초대 풍물패 상쇠까지 맡아가며 열심히 `투쟁'하다가 아나운서 손석희씨와 함께 구속, 해고를 당할 뻔 했다. 그런 일때문에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더욱 열심히 일 하려 했고, 사실 그러했다.


연 인원 수만명이 함께 만든 합작품

그 후 민요프로그램을 맡게 된 건 정말 내 운이 좋아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간 크고 작은 결실도 거두었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공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총 경비 10억여원을 아낌없이 지원해 준 회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 있었다. 내가 맨 처음 도움을 받은 제주 MBC의 한승훈 PD만 해도 나보다 더한 `괴물'이다. 누가 하란 것도 아니고 당장 방송으로 쓸 것도 아닌데 퇴근후마다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혼자 민요를 채록하고 다닌, 전설적인 인물이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받은 건가. 그 외에도 함께 고생을 겪은 동료 PD들과 국악 강사들, 노래를 불러준 어르신 등 연인원 수만명이 함께 만든 합작품이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 지금부터다. 시작은 우리가 했지만 학계에서든, 문화계에서든 그 뒤를 이어줘야 한다. 벌써 우리가 찾아낸 소리꾼 중 3분의 2가 고인이 됐다.

개인적으로 대학원 진학도 생각해봤지만 막상 이를 전공한 교수조차 없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도 고심중이다.

당장은 그간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집필중인 책부터 마쳐야겠지만 한편으론 서울대 국악과와 향후 5년간 공동국악연구작업을 진행하기로 약속이 돼 있고 앞으로 세계 민속음악학회와 교류할 계획도 추진중이다. 또 우리 민속음악발전을 위해 힘이 돼 줄 기업을 찾는 일도 곧 착수할 생각이다.

그래도 우린 한참 늦은 거다. 북한에선 이미 50년대에 구전민요를 자료로 정리해뒀다는데 놀랍지 않나? 그 때문에 연변에도 몇차례 다녀왔는데, 아무튼 이 많은 일을 언제 다 해 낼지, 정 안되면 잠이라도 더 줄일 생각이다.

하긴 우리 부모님도 새벽마다 잠을 못 주무신다. 당신 아들 방송을 챙겨 들으시느라. 매일 새벽 5시50분에 흘러나오는 MBC 라디오 `한국민요대전'은 원고도, 진행도, 연출도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프로그램이다. 시간대는 일러도 보기보다 골수 애청자가 많아 방심하지도 못한다. 오늘 아침에도 방송내용 때문에 문의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가족은 집사람과 중3짜리 아들 하나. 하지만 딸 하나쯤 더 낳을까 싶기도 하다. 사물놀이패를 만들자니 꼭 한 자리 이가 빠지는 게 서운해서 말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10/18 17:44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