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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그릇 역사기행] 양산창기(梁山昌基)


도쿠가와 바쿠(德川幕府)와 이라보(伊羅保) 찻그릇

최근 출판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일본 난세의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인간 경영학을 분석한 책이 번역 출판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영웅 모두가 한결같이 조선 찻그릇의 매니아였다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토(井戶) 찻그릇을 좋아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경남 양산 창기리 가마터에서 굽혀진 이라보(伊羅保) 찻그릇을 좋아했다.

1598년 8일18일 임진왜란의 종전 무렵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임종시를 남기고 무간지옥으로 떨어졌다.

“이슬로 떨어져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일까, 나니와(難波:오사카)에서의 일들이 꿈의 또 꿈.” 히데요시의 죽음은, `꿈의 또 꿈'을 허망하게 좇다간 무모한 남자의 최후였으며 토요토미 가문의 멸망을 초래한 원인이기도 하다.

도쿠가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1603년 스스로 세이타쇼군(征夷大將軍)이 됐다. 그는 임란 때문에 단절돼버린 조선과 중국과의 국교 회복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질서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1609년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기유(己酉)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과의 개항지역을 부산 한곳으로만 한정해버렸다. 전쟁후유증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제한하려는 의도였다.

기행자가 이라보 찻그릇의 고향을 찾아 양산군 동면 법기리 창기마을을 처음 답사한 해는 1987년 4월25일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차(茶)전문기자였던 김대성 선생과 부산의 찻그릇 연구가 박정상 선생과 함께 동래 금강공원 입구에서 양산 창기 가마터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여 잡초와 흙더미 속에 400년동안 잠들고 있던 이라보 찻그릇의 도편 발견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이라보 찻그릇의 고향에 대한 발견의 흥분은 십수년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바둥대고 사느라고 김대성 선생과 박정상 선생 두분께 자주 연락을 못드렸다. 하늘이 푸르다 못해 시린 이 가을 화개차 한잔에 그동안 못 다한 정회를 나누고 싶다. 김 선생은 `차문화 유적 답사기', 박 선생은 `찻사발'이란 명저를 각각 출판하여 후학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동래에서 범어사 입구를 지나 울산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얼마 가지 않으면 바로 창기마을이 나온다. 창기에서 법기수원지로 가는 길을 따라 300m 가량 가면 `용천농장'이 나온다. 용천농장 정원을 가로질러 흐르고있는 작은 고랑과 밭은 그야말로 사금파리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이곳이 바로100년전 창기사발을 굽던 곳으로 현재 사적 100호로 지정돼 있다. 전선 철탑이 서있는 안골짜기 밭에는 조선 중기의 가마터 흔적이 있다. 지면에서 20cm만 파내려가도 도처에 도편이 출토되었는데 이라보 찻그릇 도편과 구기보리 이라보, 기이라보, 고기 찻그릇, 그리고 하게메 찻그릇 도편이었다.

마치 이곳은 거대한 찻그릇 도편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도편의 소성상태도 좋았고 태토 자체도 정선된 것이라 하동백토가 가미된 것이었다. 오기 찻그릇 도편은 기행자가 1984년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본 것과 꼭 같았다.

임란이후 도쿠가와는 천하통일을 한 후 쓰시마(對馬島) 도주(島主)를 통해 찻그릇 견본을 보내서 동래부사에게 찻그릇을 주문했다.

아마도 동래부사는 예조판서의 허가 없이 쓰시마 도주의 뜻을 받아들여 양산 창기의 깊숙한 산속에 가마터를 설치하고 이라보 찻그릇과 고기 찻그릇을 제작, 일본으로 보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라보 찻그릇의 특징은 소지가 노랑빛 또는 연한 다갈색의 부드럽고 흙에는 모래가 섞여있고 표면에는 가는 물래 자국의 선명하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0/1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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