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와 탄광촌] 탄광촌 사북·고한에 일렁이는 '황금물결'

`회색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놀았다'던 탄광촌의 옛 영화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서울서 자동차로 쉬지 않고 4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강원도 정선군 38번 국도변. 탄광촌이 가까워지자 카지노 진입도로 확장공사로 초입부터 희뿌연 먼지가 가득했다.

산허리 중간중간 쌓여 있는 검은 탄가루, 불도저에 잘려 허연 돌살을 드러낸 산언덕, 그리고 그 틈새를 흐르고 있는 회색빛 실개천이 울긋불긋 화사한 단풍 향연을 펼치는 가을 산과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런 조화를 이뤘다.


황금의 땅에서 페허의 도시로

10월28일 강원랜드 스몰카지노가 들어서는 고한과 사북의 모습은 `회색도시',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은 삭막한 폐허와도 같았다.

마을 앞 석탄 집하장에는 검은 탄재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산 언덕 아래에는 탄광 갱도로 이어지는 녹슨 철길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것이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는 듯 했다. 마을은 카지노 개장을 앞두고 벌이는 정비사업으로 이곳저곳이 포크레인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예전 광부들이 살았던 사택이 밀집해 있는 언덕에는 집집마다 스프레이로 `철거완료'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있었다. 30여년전 슬레이트 지붕에 연탄 온돌 구조로 지어진 광부사택 주변은 쓰레기와 골조 잔해만 나뒹굴고 있었다.

석탄 산업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 말, 이곳은 그야말로 `황금의 땅'이었다. 태백 정선 사북 고한 도계 등 광산촌 주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광부들로 붐볐다.

`탄가루 묻은 돈'을 벌기 위해 마을은 술집 숙박업소 음식점 등으로 흥청거렸고 시장에는 장사치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작은 읍에 불과한 고한에만 당시 주민등록상의 인구가 3만명을 넘었고 유동인구를 합치면 무려 7만~8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이곳에선 “고한 읍내에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이 손을 잡고 다니지 않으면 잃어버린다”고 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광부로 33년 근무를 했다는 전병규(73) 할아버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한 시장에 가면 사람끼리 부딪치는 바람에 시장 바닦에 옷 단추가 수부록히 떨어져 있었을 정도였다”며 “특히 월급날만 되면 읍내 술집과 밥집은 밤새 불야성을 이루는 등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듯 했다”고 회고했다.

`가진 것 없는 자의 엘도라도'와 같았던 탄광촌이 진폐 환자와 낙오자의 폐허로 변해버린 것은 1987년부터 동력자원부(현재 산업자원부)가 석탄산업합리화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정부는 석탄 산업이 사양 산업인데다 산림 훼손과 지하수 오염, 지반 침해, 폐수 피해 등 각종 폐해가 문제가 되자 대대적인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되는 1995년까지 전국 334개 탄광을 폐쇄시키며 3만여명에 달하는 광부에 대한 대대적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 이 영향으로 이곳 고한에 있던 40여개의 탄광도 모두 폐쇄되고 이제는 삼척탄자 한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카지노는 희망의 불씨

카지노 건설은 분명 폐허 직전에 있는 이곳 탄광촌 사람에겐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와도 같다.

지난해부터 카지노와 진입도로, 사원 숙소 건설을 위해 인부들이 속속 몰려들면서 숙박업소와 음식점, 술집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역 앞에서 20여년간 밤샘 야식집을 운영해온 정암식당 주인 박모(43)씨는 “폐광 이후 계속 손님이 줄어 그동안 현상유지도 힘들었는데 작년부터 카지노 건설 인부들이 속속 들어와 여관과 음식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한창 때만은 못하지만 메인 카지노가 들어서는 2002년까지는 그런대로 장사가 될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카지노 건설이 임박해지면서 그동안 이곳을 빠져 나가던 `인구 엑소더스'가 멈추고 이제는 오히려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U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고한읍 중심가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조영식(38·여)씨가 바로 이런 케이스다.

조씨는 탄광촌 경기가 한창이던 1987년 이곳에서 구두방을 하던 남편에게 시집와서 보신탕집 장사를 했다. “그때는 정말 장사가 너무 잘돼서 곤란했습니다. 한번은 어린 핏덩이 자식을 업고 일을 하는데 손님이 자꾸자꾸 몰려오는 바람에 그만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습니다.

1990년초에 12평에 불과하던 작은 가게에서 하루 60만~70만원의 매상을 올렸으니까요. 월급날에는 돈을 세지도 못했을 정도였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러다 1990년대 중반 광산 합리화로 잇달아 주변 탄광이 폐쇄되면서 경기가 급랭하기 시작했다.

“광산은 폐쇄되고 광부들은 떠나고 하루하루 경기가 나빠졌지요. 더이상 버틸 수 없어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조씨는 1997년 이곳을 떠나 서울 상계동 아파트 건설현장 등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여름 이곳에 왔는데 식당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올해 6월 다시 이곳으로 내려왔다.

카지노에 오는 고급 손님을 유치하겠다는 생각에 보신탕집이 아닌 일식집을 차렸다. 조씨는 “장사는 예전만 못하지만 카지노가 완공되는 2002년이면 한결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치솟는 땅값, 평당 300만원 호가

카지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주변 땅값도 치솟고 있다. 광산이 대부분 폐쇄된 1990년대 중반 고한과 사북 지역의 땅값은 속된 말로 `껌값' 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였다. 변두리 집은 한 채에 20만~30만원에도 거래가 안됐고 사택은 대부분 그냥 버리고 떠나기 일쑤였다.

그나마 역전 부근의 상점만 하나둘 거래가 됐을 뿐 실제 돈을 주고 거래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건설공사가 시작된 지난해부터 이곳 땅값이 뛰기 시작해 지금은 웬만한 도심 버금가는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요지인 시장통과 역전은 평당 200만원에도 매물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

최근 카지노 개장을 앞두고는 평당 300만원을 호가한다. 이곳에 부동산이 들어온 것도 1995년경인데 아직도 알짜배기 땅은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주민들끼리 사고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한에서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남도지(44) 사장은 “카지노 건설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사람이 이곳 땅의 상당 부분을 매입하자 갑자기 지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예전의 전성기 수준 이상으로 회복했다”며 “역전이나 시장 같은 요지는 거의 매물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나오더라도 주민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바람에 실제 거래되는 것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남사장은 “집 한채에 30만원도 안됐던 38번 국도변 땅이 이제는 평당 100만원으로 수십배 이상 뛰었다. 얼마 전까지 그냥 버리고 가다시피 했던 구사택도 이제는 수백만원을 호가한다”고 말했다.


꿈틀대는 유흥업, 제2전성기 꿈꿔

경기가 살아나면서 가장 먼저 꿈틀거리는 것은 역시 술집과 여관 다방 노래방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고사 직전에 있던 이곳 유흥업소가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고한과 사북역 앞은 밤만 되면 온통 유흥업소와 야식집 네온 사인 뿐이다. 밤 9시경이 되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방 아가씨가 보자기로 싼 보온병을 들고 인근 여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시장통에 있는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강모(22)양은 “이곳에 카지노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교 친구 한명과 함께 열흘 전에 이곳에 왔다”며 “손님 중에 광부 아저씨들은 거의 없고 주로 건설공사 관계자들이나 외지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카지노 내에는 유흥시설이 없어 영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상당수 카지노 손님이 이곳 고한 읍내로 내려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지노 건설이 이곳 탄광촌 사람들에게 `장밋빛 희망'으로만 비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20여년간 살았다는 최모(53)씨는 “요즘 이 동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곤 모두 카지노 사람들과 건설 노동자들을 노린 유흥업소와 음식점 뿐”이라며 “그렇지 않아도 이곳 청소년이 갈 만한 극장 하나 없을 만큼 문화시설이 열악한 상황인데 카지노까지 생겨 환락의 도시로 변한다면 과연 이곳 부모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로 자정이 가까워 졌는데도 여중학생 또래로 보이는 청소년 3~4명이 유흥업소가 몰려 있는 역전 부근의 PC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민들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니냐" 우려

이곳에서 고랭지 농사를 하고 하고 있는 최모(54)씨도 “카지노가 실제로 지역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가 없다.

자칫하면 오히려 현지 주민의 사행심만 부추겨 이 지역을 더 망가뜨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며 “카지노가 폐광 지역 발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광부와 그 가족에게 도움이 된 것은 거의 없다.

처음에 무작정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민도 이제는 `혹시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아니냐'는 식의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국 광산노동자조합연맹(위원장 김동철)도 10월5일 “정부와 강원랜드는 카지노 대체산업에 탄광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고용 기회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해 놓고서 오히려 탄광노동자의 고용을 경시하고 있다”며 “강원랜드에 탄광노동자와 사용자의 자금으로 출자된 197억원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줌과 동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해 합리적인 운영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폐쇄 조치로 황폐화ㆍ공동화하는 탄광촌을 살리기 위한 명목으로 태백산간 오지에 들어서는 탄광 카지노. 과연 그것이 당초 취지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을 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김명원 기자

입력시간 2000/10/24 19:05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