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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50년] 친위부대 오명벗고 군정보 핵심 재탄생

`정치생활 30년을 일관한 신뢰성이 전혀 없는 위험인물.' 누구일까. 지금부터 10년전 폭로된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자료에 평가된 김대중 대통령(당시 평민당 총재)이다.

사찰자료는 이와 함께 1947년 5월 흥국해운 사장에서부터 1988년 12월1일까지 이르는 김 대통령의 중요 활동기록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1990년 10월4일은 기무사 역사상 지우기 어려운 `사치일'(司恥日)로 기록될 만 하다. 보안사(기무사)가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인사 1,303명을 불법적으로 사찰했다는 사실이 이날 물증과 함께 폭로됐기 때문.

이른바 `윤석양 이병 사건'이다. 보안사에 근무하던 외국어대 노어과 4년 제적생 출신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 사찰자료를 갖고 탈영해 양심선언과 함께 공개했다.

이 사건은 군정보기관의 정치성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보안사에 일대 풍파를 가져왔다. 이상훈 당시 국방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이 옷을 벗었고 보안사의 명칭도 현재의 기무사로 바뀌었다.


방첩활동 공 불구 `정권의 하수인' 비난

기무사가 10월21일로 창설 50주년을 맞았다. 국가정보원과 함께 기무사 만큼 공과에 대한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기관도 드물다.

기무사는 광복 후 건국과 한국전쟁 과정 등에서 방첩기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군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아왔다. 민주화 시대 기무사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여전히 탈정치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무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21일 국방부내에 `특무부대'란 이름으로 창설되면서 정보기관으로 실질적인 출발을 했다. 하지만 뿌리는 다시 그로부터 5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미군정 시절인 1945년 11월13일 과도정부 국방사령부에 설치된 `정보과'가 기무사의 맹아다.

이는 다시 1946년 1월14일 조선경비대 정보과로, 1946년 6월1일 조선경비대 정보처로 확대개편됐다. 군이 필요로 하는 정보수집, 군내 방첩활동, 국내주재 해외 무관과의 연락업무를 관장했다.

광복 이후 좌우대립이 격화하면서 정보처는 기능과 역할이 대폭 커지게 됐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보처는 `특별조사과'로 확대됐다. 같은해 11월1일 `특별조사대'(SIS)로 바뀌었다 이듬해 10월20일에는 또다시 `방첩대'(CIC)로 개명하면서 정보수사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방첩대는 군내의 좌익세력을 소탕하는, 이른바 숙군작업의 선봉에 섰다. 숙군작업에서 방첩대는 군내에 침투한 좌익 프락치 1,327명과 불순분자 5,000여명을 색출해 건군의 기반을 다졌다.

1950년 9ㆍ28 서울수복 후 방첩대가 특무부대로 재창설된 것은 대공활동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방첩대와 초기 특무부대를 이끈 사람은 `빨갱이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친 김창룡씨. 김창룡 부대장은 죄익분자 색출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면서 암살될 때까지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기무사가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인식된 데는 김창룡 부대장이 한몫을 한 셈이다.


특무부대로 출발, 역대정권과 함께 부침 거듭

정보기관의 성격과 역할은 정권과 무관할 수 없었다. 특무부대는 1960년 4ㆍ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업무가 위축되고 이름도 `방첩부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5ㆍ16 군사쿠데타에 이은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또다시 중용됐다. 민주당 반혁명 사건과 군내 부정축재자 처리, 기갑장교 반혁명 사건을 적발ㆍ처리해 정권의 보루로서 위상을 잡았다.

방첩부대가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된 것은 북한 124군 부대에 의한 1ㆍ21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 직후인 1968년 9월. 당시 무장공비들이 방첩부대원을 사칭해 서울까지 침투한 사실을 고려해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977년 10월7일에는 육군보안사령부와 해ㆍ공군 보안부대를 통합해 `국군보안사령부'로 재탄생했다. 보안사는 또다시 윤석양 이병 사건으로 1991년 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로 개명하고 업무체계를 전면 재조정했다. 기무사가 50년간 5번이나 개명한 것은 그만큼 현대사의 곡절과 무관할 수 없다.

기무사가 정치적 풍파에 가장 명시적으로 노출되고 초법적 기관으로 등장한 `황금기'는 역시 보안사 시절이다. 1979년 10ㆍ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12ㆍ12 신군부 쿠데타, 5ㆍ18광주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보안사는 `5공창출의 전위대'로 변질됐다.

보안사는 당시 신군부의 핵심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야당탄압은 물론이고 언론통폐합에서 행동대 역할을 했다.

당시 보안사 안가였던 서울 용산의 `서빙고 분실'(정식명칭 보안사 대공처 6과ㆍ일명 서빙고 호텔)은 공포의 대명사였다. 1960년대 말 설치된 서빙고 분실은 1990년 헐릴 때까지 간첩사건 뿐 아니라 시국사건까지 수사하는 `공포정치의 본산'으로 오명을 떨쳤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과 정승화 전 육참총장도 10ㆍ26, 12ㆍ12사태 후 여기서 조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5공 시절 군에서는 유달리 의문사가 많았다. 군내 좌경운동권 색출을 위한 이른바 `녹화사업'과 연관이 있다는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 의문사 진실규명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의문사 진상규명위를 발족시켰다.

취재중 접촉한 기무사 관계자는 이와 관련, “규명위에서 아직 공식적 협력요청은 없었지만 요청이 오면 사실관계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안사의 힘은 역대 사령관의 프로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보안사는 1977년 10월부터 1990년 12월까지의 14년간 사령관을 거쳤던 9명중 7명이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중에서 대통령이 2명(전두환, 노태우) 나왔고 국방장관이 1명(이종구) 배출됐다.

그러나 기무사는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군문으로 되돌아갔으며 국민의 정부에 들어 탈정치화는 더욱 공고화했다.

기무사의 업무는 방첩과 군사보안이다. `군사보안 및 군 방첩에 관한 사항과 군 및 군관련 첩보의 수집ㆍ처리에 관한 사항'(대통령령 군국기무사령부령)을 관장하고 `내란ㆍ외환ㆍ반란ㆍ이적의 죄, 군사기밀누설ㆍ암호부정사용의 죄, 국가보안법ㆍ군사기밀보호법ㆍ남북교류협력법ㆍ집시법에 규정된 죄의 수사에 관한 사항'(군사법원법 제44조 제2호)을 관장한다.

기무사의 방첩활동 실적은 눈부시다. 건국 후 모든 공안기관이 검거한 간첩 4,470여명 중 43.7%인 1,950여명을 기무사가 잡았다.


정예화, 전문화, 과학화에 힘써

서울 종로구 소격동 경복궁 옆. 지은 지 80년 된 구 경성제대 의대건물(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기무사 사령부다. 1971년 이전해온 이후 30년간 이곳에 눌러앉아 있다. 화랑가 중간에 위치해 있어 예술인들이 이전하라고 야단이다. 기무사측은 내부수리에도 한계가 있어 옮기고 싶지만 어디에도 환영하는 곳이 없어 울상이다.

현재 기무사령관은 김필수 중장(육사 26기ㆍ전북 고창). 기무사는 탈정치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보분야와 군내부에서의 힘은 막강하다. 대통령에 대한 직보체제를 갖고 있고 내부 존안자료는 고위 군인사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다른 정부기관과는 달리 정보기관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수록 좋아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다. 그런만큼 기무사의 조직과 인원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사령관 아래 참모장, 참모장 아래 3처ㆍ2단ㆍ1실이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각 지역의 예하부대도 존재한다는 것 외에 자세한 것은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다.

창설 50주년을 맞은 기무사는 정보화, 국제화 추세에 맞춰 자체 개혁을 추진중이다. `부대 전반의 정예화, 전문화, 과학화와 21세기 선전 군정보 수사기관으로서의 발전'이 개혁과제다. 기무사는 아울러 각군의 정보화와 사이버 보안에 대한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기무사에도 전우회가 있다. 1989년 만들어진 `충호회'가 그것이다. 충호회는 중앙회를 비롯해 각 시도별(경기도는 남ㆍ북부 지회) 지회가 있다. 순수 친목단체임을 표방하는 충호회 회원은 현재 1만여명.

충호회는 전역자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특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기무사 사령부의 허가를 통해 언론과 접촉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무사의 부대혼은 `절대충성'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엇에 대한 절대충성'인가가 국민의 관심이다. 그래서 역시 문제의 관건은 정치에 있다. 독재정권은 필연적으로 기무사를 비롯한 각종 정보기관의 사병화를 초래한다. 어느 정권이든 정보기관을 정권유지의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보안사에 몸담은 바 있는 한국교원대 한용원 교수(육사 19기)의 이야기. “(기무사의)정치정보 조사ㆍ보고는 최고권력자의 요구에 따라 이뤄지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하지 말라는데 무엇 때문에 정치정보를 캐내겠나.

기무사의 탈정치화는 궁극적으로 민주화에 달렸다. 기무사의 탈정치화를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에 대한 직보체제를 없애고 기무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입력시간 2000/10/2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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