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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스타열전(33)] 전세호 심텍 사장(下)

"잘 나갈 때 브레이크 거는 것도 경영"

“1997년 여름엔 반도체용 PCB가 품귀현상을 빚는 바람에 고객들이 공장을 증설하라고 아우성이었어요. 은근히 욕심도 나 공장증설을 위한 설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기공식을 마치면 곧바로 공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어요.”

전세호 사장은 그러나 기공식날 아침에 그 결정을 번복했다. 테이프 커팅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내린 전 사장의 갑작스런 결정은 주변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때 그가 남긴 말은 “조금 더 자신이 붙을 때까지 내실을 기하겠다”는 것.

청주의 공장까지 내려왔던 내외귀빈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만약 계획대로 공장을 확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심텍은 5~6개월 후에 우리나라를 덮친 IMF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좌초했을지 모른다.

“잘 나갈 때 브레이크를 거는 것도 경영이고 경영자의 용기라고 생각했다”며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전 사장.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릴 뻔 했던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금도 회사경영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회사와 주주, 심텍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없으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전 사장은 부단히 시장변화와 기술발전의 흐름을 빠뜨리지 않고 챙긴다.

또 21세기의 가치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기 위해 관련 전문가와의 만남도 늘여가고 있다. 심텍이 반도체 시장의 흐름에 맞는 차세대 제품을 남보다 먼저 개발, 양산체제를 갖추게 된 것도 내일을 앞서 보는 전 사장의 경영전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미투자유치 성공으로 자신감 얻어

“반도체용 PCB 분야에 특화된 전문업체로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장기비전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원천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전 사장의 이같은 소신이 처음으로 세계시장에서 먹혀든 것은 국내경제가 IMF체제로 가장 어려웠던 1998년 6월이다. 당시 전 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행사 일환으로 뉴욕 등지에서 개최된 대미투자유치단에 뽑혀 70여개 한국 벤처기업을 대표해 연설을 했다.

그는 반도체용 PCB 산업의 세계적 흐름을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심텍이 갖고 있는 뛰어난 기술수준과 비전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런 회사에 투자해달라”고 요청했다. IMF 체제로 고통받는 한 벤처기업가의 장기비전에 감동을 받은 투자자들은 즉석에서 투자를 약속했다.

이 사건(?)은 대미투자유치단의 최고성과로 꼽혔고 전 사장이 세계 반도체용 PCB업계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의지만큼 실천에 옮기기는 힘들지요. 당시는 IMF체제로 국내의 수많은 기업이 자금난을 겪을 때였기 때문에 투자유치 성공은 큰 힘이 됐습니다.”

심텍의 외자유치는 지난해 3월 미국의 보험회사 AIG의 2,200만 달러 투자로 절정에 올랐다.


쉬지않는 기술개발과 사업확장

투자유치로 성가를 올린 `심텍의 신화'는 곧바로 기술개발로 옮겨갔다. 심텍은 PCB업체로는 처음으로 칩스케일패키지(CSP)와 멀티칩모듈(MCM)용 기판의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CSP기판은 반도체를 패키지화하기 위한 핵심소재로 그동안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업체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최첨단 제품이다.

또 MCM용 기판은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 안에 통합하기 위한 초박형 부품으로 차세대 반도체 PCB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부품이다. 심텍의 매출은 급격히 늘어나 올 상반기에는 지난해보다 80% 가량 늘어난 400억원을 기록했다.

순익은 85억원. 올해 총매출 규모는 1,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나아가 심텍은 올해 초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메이커인 미국의 램버스사와 차세대 램버스 D-RAM 모듈기판의 공동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차세대 램버스 D-RAM 모듈기판은 기존제품보다 주파수 폭 4배, 속도가 2배 이상 빨라 차세대 네트워킹 애플리케이션 시장을 주도할 핵심 제품이다.

전 사장의 사업영역은 이제 반도체용 PCB업체에 머물지 않고 통신장비쪽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업시작 단계에서 좀 더 유망한 반도체를 선택하고 통신장비쪽을 버렸던 전 사장으로서는 반도체와 통신장비가 통합되는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 이동전화 기판에도 뛰어든 셈이다.

아직은 전체 사업규모에서 5%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동통신을 비롯한 인터넷 네트워크 시스템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고다층 임피던스 보드 기술개발 작업은 이미 완료했다.

세계 1위의 PCB 생산업체인 일본의 CMK와 기술제휴를 통해 이뤄낸 성과지만 캐나다의 유력 통신시스템업체와 미국 록웰사에 이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이처럼 쉬지 않는 기술개발과 신제품 출시로 마그마처럼 끓는 기업가 정신을 보여준 전 사장은 인간적으로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형님이 운영하는 가업(家業)인 청방보다 심텍이 더 나아 보인다"고 평가하자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올 정도로 겸손하기도 하다.

세계에서 톱3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업은 과감히 버리는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사장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전 사장. 그는 반도체용 PCB분야에서 잭 웰치가 되고 싶어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R&D를 늘려야 한다”는 그의 소신이야 말로 심텍을 PCB업계의 GE로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0/10/2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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