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너무 영화적이면 오히려 비영화적이다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드라마틱하거나 재미있는 일을 볼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쓴다.

그만큼 영화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극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극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라면 재미가 없다. 우리가 흔히 리얼리즘이라고 말하는 것도 현실을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표현될 때 영화적인 힘과 가치를 지닌다.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15분 동안 사실적이고 강렬한 전투장면으로 관객들의 얼을 빼놓고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루카스는 또 어떤가.

마치 전자게임을 하듯 한바탕 우주쇼를 연출해 놓고는 우주 적과의 대결을 아주 익숙한 영화적 패턴으로 펼쳐간다. 홍콩의 왕자웨이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작 스타일은 현실의 감정들을 표면화하여 관객들을 영화속의 주인공으로 전이시킨다.

관객들은 마치 영화를 현실로 착각한다. 그것은 현실의 도피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응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정이입이야말로 영화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환상을 집어넣고, 비현실이면서 현실같은 구조를 이룬다.

영화는 그것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내려오는 네러티브의 공식을 따른다. 3장 8절로 끝없이 관객을 긴장시키며 영화로부터 관객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는 장치들을 배치한다.

인물의 설정이나 그들의 행동양식이나 성격까지 규정된다. 그래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보다 극적이고, 그들이 엮어내는 긴장과 갈등도 극단적이다.

그 영화적인 것들이 때론 영화를 헤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상투적'이라고 할 때 그 영화는 영화적 공식에 너무나 익숙하다는 의미이다. 한국 최초로 불을 소재로 한 재난영화 `싸이렌' (감독 이주엽)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한국영화로는 화려한 불의 액션을 시도했고, 그 시도 위에서 영화는 갈등과 우정과 음모와 사랑을 비감하게 전개한다. 119구조대원 강현(정준호)와 임준우(신현준)는 친구이면서 물과 불처럼 다르고, 그 때문에 사사건건 부딪치고, 또 다른 음모와 비극을 잉태한다.

임준우의 가족사나 사랑하는 연인의 존재,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갈등이 아주 영화적 인 방식으로 설정되고 그려진다. 가난에 고통받는 고참, 성마른 대원, 포용력 있는 대장 등 119구조대원의 구성도 아주 영화적이다.

마지막 희생과 비극으로 우정을 확인하고, 사랑의 아픔을 크게 하는 것도 구조대원의 현실을 강하게 드러내려는 영화적 발상이다. 이렇게 `싸이렌' 은 영화적이고자 했다.

김형태 감독의 `물고기 자리'는 또 어떤가. 공간부터 탈 현실적이다.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비디오 대여점이고 아파트이지만 일상의 냄새를 지워버린 동화적, 환상적 공간이다. 그것이 영화적인 아름다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속에서 펼쳐지는 애련(이미연)의 이루지 못할 비극적 짝사랑 이야기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더구나 `물고기자리'는 애련의 감정을 정신병적인 집착과 광기로 과장한다. 긴장과 갈등의 극대화를 위한 익숙한 영화적 공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영화는 현실성을 더욱 잃고 그나마 감정의 혼란까지 야기한다.

너무나 익숙한 공식에서는 상투성이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는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새로운 스타일과 표현방식으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너무나 영화적인 관습에 충실해 오히려 영화답지 못한 신인감독들. 모든 것을 영화속에서 생각하고 찾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머리와 가슴이 낡아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0/10/24 21:5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