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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산야초 전문가 권정연

경기도 이천의 `옹화산방' 주인은 좀처럼 외출이란 걸 모른다. 친구들이 불러도 밭일이 바쁘다며 두문불출이다. 깔끔하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여자지만 세수를 안 하고는 살아도 호미질을 쉬고는 못 산다.

새벽 4시면 벌써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끌고 캄캄한 텃밭에 나가 호미질을 하고 앉은 여인. 산야초(山野草) 전문요리점 옹화산방 주인이자 산야초연구가인 권정연(48)씨의 일상이다.

할 일은 끝없이 많다. 식당 주변을 에워싼 약 700평의 땅과 뒷산이 모두 그녀의 텃밭이다. 지고 피는 모든 꽃과 풀이 그녀에겐 음식재료. 싱아와 바위채송화, 꿀풀나물, 쌔비듬 등 그녀 땅에만 100여종이 자란다.


“발치에 온통 산야초인데 웬 서양허브”

어려운 이름을 들출 것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박꽃이나 채송화를 보자. 호박꽃은 무침요리에 날것으로 얹어 먹거나, 채송화는 생채로도, 샐러드 소스로도 일품재료다.

길가의 맨드라미도 김치와 어울리는 천상의 궁합이란 걸 아시는지. 자체로도 무공해지만 함께 섞인 다른 야채의 농약성분 등 독성까지 해독시켜주는 `상생'의 식품들이 많다.

청을 빼거나 분말, 액체를 만드는 등 산야초 조리법도 가지가지. 그중 가장 까다롭지만 그럴수록 그녀에게 신이 나는 건 식초나 간장 같은 발효식품을 만들 때다. 최소한 3년에서 길게는 10년 넘게 숙성시키기 때문에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간장 하나만 해도 벚 열매로 만든 벚간장을 비롯해 산야초 뿌리나 잎 등으로 수십가지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자두와 석류, 오미자를 넣어 만든 그녀의 식초도 한번 맛보시기를! 상큼한 맛 뿐만 아니라 화려한 자연색이 눈부셔 차마 먹기가 아까울 정도다.

유행처럼 다가온 서양 허브 바람도 다 등잔불 밑이 어두운 사람들 얘기다. 주위를 둘러보라. 삼한사온의 변덕을 이기고 자란 최고급 한국 허브가 산마다 들마다 흐드러지게 널렸다. 제 발치의 산야초는 버려두고 남의 뒤만 좇는 현실이 권씨에겐 답답할 뿐이다. 옛날부터 먹어오던 우리 식품을 마치 신기한 실험작품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그래서 달갑지 않다.

“이건 신비한 요리가 아닙니다. 원래 선조들이 일상 먹어오던 것을 잠시 우리가 잃어버렸던 뿐입니다. 뭣보다 서양처럼 자료화 돼있지 않아서 그런 탓이 크지요. 어떤 분들은 야생풀의 독성을 걱정하지만, 그것도 가공방법만 바꾸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흔히들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애기똥풀도 말려서 묵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괜찮습니다. 모르는 건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을 찾아봐도 알 수 있고, 뭣보다 제 자신이 직접 다 먹어보고 경험한 뒤 음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독성에 대해선 무턱대고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


화초처럼 자랐지만 들꽃과 사는 운명

타고난 음식솜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치더라도, 도회지에서 자란 그녀가 산야초 전문가로 변한건 운명이랄 수 밖에 그녀 자신도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고향은 공주,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며 화초처럼 자랐다. 종가집 종손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손에 물 한번 묻혀보지 않았던' 부잣집 셋째딸.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가 장래 꿈을 묻기만 하면 `하얀 수건을 머리에 눌러쓰고 커다란 옹기속의 된장을 꾹꾹 눌러 담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 이상한 꿈은 결혼후 옹기수집 취미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후 종부로 시댁을 찾았을 때도 그 많은 옹기를 갖게 됐다는게 가장 감격스러웠다는 권씨. 수집광이라기보다 수집벽에 가까울 만큼 많은 옹기를 모으던 중, 경기도 수지의 한 아파트에 살 땐 그녀가 가진 옹기무게때문에 아파트가 무너질 지 모른다는 주민들의 민원으로 입주 2년 만에 쫓겨나기도 했다.

산야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첫 딸을 낳은 후 남편을 따라 경기도 삼송리에서 첫 시골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처음으로 맨드라미 김치나 꽃다지 먹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이웃 할머니들.

하나 둘씩 따라하다가 나중엔 그녀 스스로 찾아다니기도 했다. 딸의 이유식도 서양식 베이비푸드 대신 직접 캔 산나물에다 된장을 풀어 암죽을 끓여먹였던 26살짜리 별난 초보엄마.

병원의 빈 링거병을 얻어다 씻은 뒤 송진을 넣고 밀봉 저장, 그렇게 우리식으로 거둬 키운 딸은 지금까지도 건강하고 피부도 깨끗하다. 한때는 토끼풀로 고기 햄버거의 야채 속을 만들어 이웃들과 맛있게 나눠먹기도 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산야초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그녀가 구절초를 이용해 만든 김치는 일대 주부들에게도 대단한 인기였다. 자신들의 것까지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밀려들면서 한번에 2만 포기씩 김치를 담그고 살았다. 걸린 시간만 두달, 언젠가 고추장 주문까지 맡았을 땐 날이면 날마다 가스불을 끼고 사는 그녀집에 난데없이 소방차까지 출동한,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녀의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지난 96년 본격적인 산야초 전문점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돈벌이는 처음부터 욕심밖이었다. 임자없이 널린 것이 산야초라곤 하지만 음식으로 장만하기까지 드는 인건비며 장기간 저장, 숙성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아주 비싼 값이 아니면 결코 수지가 맞지 않으리란 걸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네 머리와 손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건지 한번 열어보고 싶다'며 그녀의 남다른 눈썰미며 음식솜씨에 감탄하던 친구들조차 음식점 개업만은 말렸다. “네 성미엔 정도(正道)만 갈 게 뻔하고, 그래서는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는 거지요. 예약이 밀릴 땐 하루 200명씩 몰릴 만큼 찾는 손님들은 많지만, 매일같이 가게가 꽉 찬다고 해도 이건 근본적으로 적자거든요.

처음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만원짜리부터 3만8,000원짜리까지 메뉴를 나눴는데, 결국 누적된 적자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어서 최근 2만원짜리 식단 하나로 통일해버렸어요. 그래도 적자입니다. 식초 한잔에 만원쯤 받아야 겨우 수지가 맞을까. 하면 할수록 제 살을 깎는 결과 뿐이지만, 그래도 한가닥 사명감때문에 악으로 버티는 겁니다. "


까먹기만 하는 음식점, 사명감으로 버텨

갖고 있던 재산도 다 털어넣었다. 원래 국내 유수의 건설업계에 종사하던 남편은 부인 권씨의 사업 빚을 청산하느라 조기 퇴직, 현재 설계사무소에서 근무중이다.

은행 빚 이자는 물론 종업원 월급도 주지 못한 날도 있다. 목숨보다 더 아꼈던 옹기 2,000여점도 남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 그렇듯 가슴 아픈 고비를 넘어온 지금 남은 거라곤 현재의 식당과 상처투성이 몸뚱아리뿐이지만 아직도 은행의 빚 독촉 전화보다 더 참기 어려운 건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고픈 사람들이 있는데 재료비가 없어 참아야 할 때다.

사실 그녀는 만드는 데만 명수가 아니라 퍼주는 데도 일등이다.

요즘도 100명이든 200명이든 기회만 닿으면 어려운 이들에게 공짜 음식을 만들어 나르기 바쁘지만, 산방을 열기 전 38평 아파트에 살 땐 남편 몰래 파출부 일을 하며 돈을 마련, 어려운 노인들 뒷바라지를 한 적도 있다.

파출부 일이 부끄럽진 않았냐는 물음을 던지자 돌아오는 대답에 가슴마저 따끔하다. “그게 어때서요? 직업엔 귀천도 없고, 더구나 그 돈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먹을 것, 생활비도 대드릴 수 있으니 즐겁지 왜 부끄럽겠어요. "


몸바쳐 일군 텃밭, 음식점은 문 닫을 위기에

권씨의 풍성한 텃밭 산야초도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직접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모종을 캐다 옮겨 심으면서 재배해낸 것들이다. 뱀이나 송충이에게 시달리기도 다반사, 가까운 산과 들은 물론, 울릉도, 흑산도까지 찾아가 캐 온 것도 있다.

음식 맛도 호텔요리 못지 않은 고급이지만, 한 장에 평균 기만원을 호가하는 이천의 한 도예가의 작품들로만 음식을 담는 것도 그녀의 별종다운 원칙 중 하나.

그러나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그릇들이 깨지거나 금이 가는 등, 그릇 값 8.000만원이 공중에 사라졌을 땐 그 깨어진 그릇자루를 붙들고 엉엉 울기도 했다. 이후 식기와 주발 등은 예쁜 놋그릇과 놋수저로 교체됐지만 나머지 그릇은 여전히 도예품 그대로다.

산야초 음식을 만든지 22년. 이만하면 가시적인 소득도 보일 때가 됐으련만 마음만 행복할뿐 안타깝게도 권씨의 현실은 어둡고 힘겹다.

옹화산방은 현재 경매가 진행중인 상태. 언제 어떻게 가라앉을지도 위태한 난파선 위의 선장처럼 그녀는 비장하기마저 하다.

“그래도 이 산방이 문을 닫으면 울 손님들이 많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비록 집도 절도 다 잃고 상처투성이 몸만 남았지만 이만치 온 것 만해도 제 인생은 성공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진 게 많았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제 자신에겐 더 사랑스럽고 좋아보입니다.

옛날의 저라면 돈은 더 많아도 훨씬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더 닥친다 해도 자연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결코 저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

조금 따갑다 싶을 정도로 시종 당당하고 깐깐하던 그녀의 눈에 일순간 눈물이 맺혔다. 얼마나 힘든 길을 가고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인터뷰가 있던 날, 그 경황에도 산방의 출입구를 새로 트는 작은 공사를 시작한 권씨.

큼직한 바위 몇 개를 비뚤비뚤 연출해 더 예쁜 입구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누가 타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 6개월에 한번씩은 어딜 어떻게 바꾸든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천성적으로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몸을 놀리는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귀띔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작명한 `옹기와 꽃의 산방'은 새 출입구를 얻어 좋겠지만, 이천 산골의 여장부 권씨의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풀냄새 흙냄새가 몽롱한 권씨의 산방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관상용 꽃이 아닌 식용 꽃과 들풀이 일제히 새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10/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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