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30)] 김해

가락왕국(駕洛王國)의 차향(茶香)과 김해 가마터

지금은 고층아파트로 밀집되어 부산의 위성도시로 변해버린 `가락왕국의 고도' 김해를 찾아서 떠나는 길에는 낙동강 하구언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갈꽃만 유난히도 흩날렸다.

낙동강의 종착지, 모래톱과 갈대숲에는 고대 가락왕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700리를 쉼없이 달려온 낙동강물과 비옥한 평야가 어우러져 독창적인 가락문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보석과 같은 사화로 엮어진 가락왕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왕국의 공주 허황옥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가락왕국의 김해식 토기는 오늘날 한국 고고학계의 불멸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잃어버린 왕국'으로만 베일에 싸여있던 가락국의 실체가 최근 김해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속속규명되고 있다.

또한 잊혀진 가락왕국의 차문화도 2,000년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1989년 10월 중순부터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의 3차 발굴에서 밝혀졌듯이 김해와 동래는 금관(金冠)가락의 중심지다. 더군다나 2,000년전 인도의 아유타 왕국에서 허왕후가 시집올 때 혼수물로 차씨를 가져와 심은 곳이 김해이고 보면 김해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차문화의 발상지인 것이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밑거름이 된 가락차는 잃어버린 왕국 가락국의 운명과 함께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져버려 그 존재마져 부정당해온 것이 그동안 우리 학계의 현실이었다.

지금도 김해시 동상동 차밭골(茶谷)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고목의 차나무 100여 그루가 야생하고 있다. 김해가 시로 승격하면서 수로왕릉에서 이곳 차밭골까지의 길을 `다전로'(茶田路)라고 명명하였다. 김해에는 가락국의 차문화에 관한 잔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기행자가 1987년 당시 한국일보의 김대성 기자와 함께 차밭골의 현장을 답사하고 수령이 약 300년 가까이 되어 보이는 차나무들을 발견하였다. 이웃 일본의 경우라면 이 정도의 차나무라면 충분히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후세에 잘 보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난개발로 인해 이 차나무가 언제 사라져버릴지 아무도 모른다.

김해 일대 가락국의 고분에서는 당시 가락국의 뛰어난 토기 장인의 솜씨로 구워진 토기 찻그릇이 발굴되고 있다.

이들 토기 찻그릇은 모두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가락국의 운명과 함께 차와 차그릇을 포함한 차문화는 역사 속에 완전히 묻혀졌다.

왕조가 몇차례 교체된 후 조선왕조에 들어 김해에는 가마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찻그릇이 만들어졌다. 임란직후 도쿠가와 바쿠가 쓰시마(對馬) 도주(島主)를 통해 동래부사에게 많은 양의 찻그릇을 주문해왔다. 동래부사는 예조의 허가를 얻어 부산과 가까운 김해에 기존 가마를 확장하여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처음 김해 가마터에서 구워진 찻잔을 `고쇼마루'(御所丸)란 배에 싣고 갔기 때문에 이 찻잔을 `고쇼마루 찻그릇'이라 하여 당시 도쿠가와 바쿠에서는 신주 모시듯 하였다. 김해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하구라는 뱃길이 있어 찻그릇의 대량수송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김해 가마터는 조선 초기부터 부드럽고 매끄럽고 곱게 보이는 백자 그릇들을 빚어왔다. 임란 직후에는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의 주문 찻그릇을 짧은 기간이지만 구웠다.

이들 찻그릇의 디자인과 모델을 일본에서 보내온 것이고 원료와 기술은 조선의 것이였다. 당시 가마터는 지금 동광 초등학교로 변해버리고 가마터는 흔적 조차 없어져 한일간의 도자기를 연구한 후학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0/31 19:1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