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정치권과 정면승부 나섰다

`총구를 정치권으로 돌려라'

한나라당의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안 발의로 빚어진 검찰과 한나라당의 갈등이 일촉즉발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탄핵안을 국회 본회의 보고후 의결 절차를 밟는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하고 이에 맞서 검찰도 공세적 기세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사범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나라당이 `편파수사'라며 정치공세를 펼 때만해도 검찰은 숨죽이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탄핵안 발의 이후 검찰의 태도는 180도 돌변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정면대응으로 돌아선 것이다.


일전 각오, 심상치 않은 기류

검찰이 한나라당과 일전을 각오한 듯한 모습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한나라당의 선거사범 편파수사 주장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자료를 공식 브리핑 한 것이나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공식 입장을 발표한 점만 보더라도 검찰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0월23일 국회 법사위의 서울지검 국정감사에서 김각영 서울지검장의 답변은 검찰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김 검사장은 이날 의원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안이 표결에 부쳐질 경우 검찰권 행사에 있어 대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동안 자료를 내거나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한나라당 의원의 면전에 대놓고 공개적 `경고'를 한 것이다.

이같은 검찰의 태도는 보통 국감기간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피감기관의 일반적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셈이다.

대검 공안부가 `탄핵소추 검토'라는 A4용지 6쪽짜리 발표 자료를 통해 “한나라당의 탄핵소추 발의는 위법이므로 반드시 철회돼야 한다”고 요구한 그 시각, 서울지검에서는 국감의원의 질의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더욱이 탄핵소추 대상인 박순용 검찰총장과 신승남 대검차장은 11월2일과 7일 두 차례나 대검 국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검찰 수뇌부가 뭔가 단단히 작심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탄핵안 발의는 위법” 주장

검찰은 이날 “탄핵소추는 정치적 책임을 묻는 국무위원 해임 건의와 달리 공무원의 구체적 위법행위에 대한 제재 수단이므로 법률상 엄격하고 구체적인 요건을 갖춰야 한다”며 “검찰총장이나 대검차장이 특정 선거사범에 대해 어떻게 지휘함으로써 기소나 불기소가 위법하게 이뤄졌는지를 명백히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안 발의는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어 “기소되거나 재정신청된 의원이 탄핵안 발의나 탄핵안 가부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적법한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한나라당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까지 추가해 쏟아놓았다.

한나라당이 발끈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 한나라당은 “탄핵소추는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권한인데도 검찰이 이를 문제삼는 것은 집단이기주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검찰의 오만함을 드러낸 것이다”며 “어떻게든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켜 정치 검사를 뿌리뽑는 계기로 삼겠다”고 공세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그러나 문제는 일선 검사들이 대검의 입장에 동조하며 술렁이고 있다는데 있다. 19일과 20일 사법연수원 18~20기 검사들이 기수별 모임을 가진 뒤 검사들의 집단행동을 경계하는 여론이 일고 대검이 긴급 진화에서 나서 평검사의 움직임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서울지검 등 일선 검사들이 여전히 격앙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선 검사 사이에서는 “탄핵안이 표결에 부쳐지거나 가결될 경우 전 검사가 나서 정치권 사정에 돌입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또 “이번 기회에 국회의원을 구속수사할 경우 법무부 장관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돼 있는 현행 검찰 내규를 즉각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한나라당의 행태는 검찰조직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밖에 없다”며 “탄핵안 표결은 일선 검사의 정치권과 전면투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중립 훼손, 신뢰 잃을 수도

아직까지는 평검사의 움직임이 조직적 양태는 띠고 있지 않지만 도화선에 불만 댕기면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잠재돼 있는 상황이다.

물론 여전히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검사도 만만찮다. 탄핵안이 가결될 경우 검찰조직이 입는 상처도 크지만 그렇다고 검찰이 야당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해쳐 검찰에 대한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평검사의 집단반발은 야당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되레 야당의 의도에 걸려드는 꼴이므로 집단사표 등 무리수를 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검찰이 정면돌파로 나선 배경에는 탄핵안이 일단 표결에 부쳐지면 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위기의식이 크기 때문이다. 탄핵안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137명)로 의결되는데 한나라당이 133명이어서 자민련과 무소속 등에서 4표만 더 얻으면 한나라당의 뜻이 관철될 수 있다.

특히 자민련을 믿을 수 없는데다 여당 중에서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의원이 10명이나 돼 이들이 당론을 따르지 않고 검찰에 대한 `감정풀이'를 할 개연성이 많다는 것이 검찰의 시각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표결에 들어가면 자칫 `어, 어'만 하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선 검사들은 한나라당이 신승남 대검차장을 탄핵대상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 더욱 흥분된 듯하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참모에 불과한 대검차장을 탄핵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가 당리당략에 따른 한나라당의 `검찰 길들이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이 호남 출신으로 차기 검찰총장으로 유력한 신 차장을 이번 기회에 낙마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검찰은 분석하고 있다.


탄핵안 가결될 경우 전면전 불사

검찰과 한나라당은 2일과 7일 대검 국감에서 탄핵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본회의가 시작되는 8일 한나라당은 탄핵안을 보고한다는 방침이어서 전날인 7일 대검 국감에서는 한나라당 의원과 대검 간부간에 불꽃튀는 기세싸움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검찰과 한나라당의 갈등 국면이 기세싸움으로만 끝날지 파국으로 치달을지는 여전히 예측불허다. 민주당이 탄핵안의 본회의 보고 자체를 막겠다는 입장이어서 아직까지는 본회의 상정 여부 자체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검찰 태도로 볼 때 탄핵안이 가결된다면 검찰이 세풍, 고속철 로비수사를 재개 또는 확대하고 대우그룹 부실회계 수사를 비자금 사용처까지 캐들어가며 총구를 정치권에 정면으로 겨누는 전면전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진동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31 21:56


이진동 사회부 jad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