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강서구 화곡동(禾谷洞)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0세기께의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난다. 그 시기에 쌀(벼)이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은 유적지에서 나온 탄화된 쌀의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이나 토기편에 찍혀있는 벼의 흔적이 말해준다.

나라안의 여러 곳에서 출토된 탄화미 가운데 여주 흔암리의 청동기 집자리에서 발견된 탄화미가 기원전 7세기께의 것으로 밝혀져 이미 그 무렵에는 쌀(벼)농사가 보편화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999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울산 무거동 옥현에서 7세기께의 논 유적도 발굴된 적이 있다. 논산 마전리 유적에서는 웅덩이 수로 등 관개시설까지 갖춘 5세기께의 층계식 논이 발굴돼 고대 한국쌀(벼) 경작법의 우수성을 드러냈다.

중국에서는 아직 논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여러 논 유적이 발굴되기는 했어도 고작 기원전 4~5세기를 넘지 못한다.

한국에는 4세기 무렵에 이미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이 보급돼 있었다. 대전 괴정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방패형 동기에는 보습을 사용해 밭갈이하는 사람이 새겨져있다.

삼국시대에는 쌀 생산이 국가적으로 장려됐다. 세금도 쌀로 받았다. 귀족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했다. 고려에 오면 인구가 증가하고 쌀 선호도가 높아져 한때 쌀이 화폐 노릇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떡, 술 등 100여 가지의 쌀 가공식품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2~3년만에 한번씩 짓던 쌀농사를 매년 짓게 된 것은 11~14세기였고 모심기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때 통일벼의 육종에 성공해 식량의 자급자족은 물론 쌀 수출시대를 맞기도 했으나 198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우리나라의 쌀농업은 위기에 직면해있다.

겨레와 3,000여년을 함께 해 온 쌀은 단순한 식량만이 아니라 생활 언어 문학 예술 종교 등의 영역에 구석구석 배어들어 민족의 생활과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벼(쌀) 농사의 근본은 역시 전답(田沓). 밭 전(田), 논 답(沓)의 순서로 말하면 `밭논'이라 해야겠는데 `논밭'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논의 비중을 큼을 짐작할 수있다.

밭 전(田) 자는 약 3,400년 동안 갑골문자 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희귀한 경우다. 옛날에는 전답을 통틀어 전이라 하였다. 논 답(沓) 자는 삼국시대때 밭에 물을 댄다는 뜻으로 만든 우리식 한자다. 중국에서는 수전(水田) 또는 도전(稻田)이라고 한다.

물대기 좋은 논을 상답, 바닥이 물길이 좋은 기름진 논은 고래실, 물끈이 좋은 논을 고논, 물이 쉽게 빠져 잘 마르는 논을 엇답, 천둥이 치기만을 기다리는 천둥지기(天水沓), 깊은 바닥에 박힌 논을 깊드리, 그 반대는 높드리, 샘물 끌어대는 논은 샘받이, 비탈진 산골짜기에 층층으로 있는 논은 다랑논, 땅이 건 밭은 개똥밭, 자드락에 있는 밭은 자드락밭이라 했다.

서울에도 물길이 좋은 기름진 논인 고래실이 있다. 화곡동(禾谷洞)이 바로 그곳이다.

오늘날 강서구 지역은 김포공항이 자리할 만큼 들이 넓은데다가 벌판에 산이 있어 `벌메'가 `발메→발산'으로, 또 비탈진 골짜기라는 뜻의 `벼릿골'이 `벼릿골→볏골'로 발음되면서 한자로 뜻빌림한 것이 화곡(禾谷).

그 땅이름에 걸맞게 서울 25개 구가운데 제일 쌀(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으니 땅이름과 무관하다 않겠는가.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

입력시간 2000/10/3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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