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없는 시민 운동”

정부로부터 과도한 재정지원을 받아 많은 사람의 비판을 받아온 시민운동이 또한번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경실련 등 16개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의료개혁시민연합'이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산업진흥원으로부터 의약분업 홍보 및 소비자 교육 등을 대가로 4억여원을 받기로 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것. 시민단체들은 이 돈 중 일부를 이미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지만 시민단체가 비정부 기구(NGO)인만큼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것.

더구나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시민단체가 의약분업의 본질적 문제는 외면한 채 의사들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집단이기주의자로 매도, 정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줄곧 비판해온 의료계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이다.

한편 아셈 회의를 10여일 앞둔 지난 10월10일 `인권실천시민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10개 단체는 “아셈 2000 한국 민간단체 포럼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민간단체 포럼이 재정과 운영, 대정부 관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탈퇴 성명을 통해 “아셈 민간단체 포럼을 주도하는 시민사회 단체들은 아셈회의를 통해 세계화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정부간 회의의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로비력을 확대한다는 1990년대 NGO 운동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원칙 흔들린다” 비판 우려의 목소리

두 사건은 최근 들어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시민단체 스스로가 확인시켜준 셈이다.

지난 9월 대구ㆍ경북 지역 변호사 112명은 “비관변 초당파 운동으로 압력단체 역할을 해야 할 시민운동마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거의 모든 단체가 법치주의의 위기에 침묵하고 있다”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또 지난 10월12일에는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원장 정갑영)이 `시민운동,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정책 포럼을 열고 학계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시민운동의 제반 문제점을 논의했다.

이날 포럼에서 정수복 사회운동연구소장은 “중앙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민운동이 정치세력화함으로써 시민세력이 견지해야 하는 비영리, 비정부, 비당파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으며, 정당조직과 같은 중앙조직 중심으로 활동함에 따라 지역주민의 삶의 현장과의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도 `시민단체의 목적 전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시민단체들이 정부의존적 활동, 내부인건비 중심의 예산집행 등으로 인해 순수한 공익적 목적성을 상실하고 있다”며 “이러한 시민단체의 목적 전치가 시민의 불신 및 참여부재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함께 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창 사무처장 역시 `시민운동 10년이 낳은 문제 -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극복을 위한 작은 생각'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관료주의와 언론 플레이 식의 활동방식을 비판하고 “시민운동의 지지기반이 조직화된 시민이 아니라 쉽게 변하는 불안정한 여론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시민운동에 대한 각종 비판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이라는 표현으로 모아진다. 여기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대(對)정부 관계.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가 시민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기 보다는 정부에게 휘둘리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친정부적 성향을 보인다는 비판이다. “NGO는 비정부기구(Non- Government Organization)가 아니라 친정부기구(Near Government Organization)를 뜻한다”는 비아냥이 있을 정도다.


시민단체 입 막는 정부지원금

정부와의 관계는 시민운동의 가장 큰 딜레마다. 시민단체는 정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생명.

하지만 재정이 부실한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정부의 지원금에 의존하고 있다. 1996년 2억, 1997년 1억으로 잇달아 적자를 기록한 경실련의 경우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노동부 실업극복 예산 2억5,000만원을 비롯, 모두 5억여원을 정부 부처에서 지원받았다.

여성민우회도 여성특위를 비롯한 여러 부처에서 8억여원을 받았고 환경운동연합 역시 보건복지부로부터 1억4,000여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또 시민단체 중 상당수는 아예 정부 지원금이 주수입원인 경우가 많다.

자체 회비만으로는 활동비를 제하고 나면 상근자 임금 지급 등 최소한의 유지도 힘들기 때문이다. 월회비 1만원을 내는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참여연대 정도가 되어야 정부지원금 없이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다.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은 알게 모르게 시민단체의 입을 막기도 한다.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낙선운동과 입법 문제 등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지만 막상 정부의 공적 자금 사용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여러 단체가 연대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참여연대 이태호 시민감시국장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법 제정 같은 사안에는 여러 시민단체가 쉽게 연대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 대해서는 서로 지향과 사정이 다른 시민단체 간의 연대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보다 근본적 원인은 부실한 재정에서 비롯된 정부의존보다는 시민단체 스스로가 만들어낸 몇가지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백화점식 사업과 명망가 위주의 활동 방식, 그리고 조직의 비민주성이 그것이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대개 한두가지 이슈에 집중하기 보다는 사회적 논란이 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수많은 사안에 개입한다. 경실련의 경우 경제정책위원회 등 각기 다른 업무를 담당하는 20개의 위원회와 각종 협의회, 4개의 부설기관과 5개의 개별기구와 1개의 유관기관 외에 32개의 지역조직과 지역별 협의회가 있다.

참여연대도 10개의 위원회와 협의회, 5개 부설기관 및 6개의 사무처, 15개 회원모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전체 회원의 합의에 기반한 소규모 내부운동 보다는 정부나 정당 등을 상대로 입법청원을 하거나 의정활동 감시, 또는 압력 행사 등 가시적이고 굵직한 사안에 주력하게 된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는 “시민운동이 애초에 전문가나 지식인의 참여로 시작됐기 때문에 공동체 운동 보다는 정치색을 띄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명망가 중심활동, 조직의 비민주성등 문제 많아

명망가 중심의 운동방식도 시민운동의 고질적 병폐. 많은 시민단체들은 “녹색연합 하면 장원”, “경실련 하면 서경석”이라는 식으로 단체보다는 대표가 두드러진다. 보다 효과적인 홍보와 영향력 제고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명망가 중심의 활동은 득보다 실이 많다.

대외적으로는 장원 전 녹색연합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이 말해주듯 명망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직 전체가 타격을 입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을 비민주적으로 만든다.

지난해 유종성 전 사무총장의 칼럼 대필 사건 때 이를 비판하는 연판장을 돌린 경실련 상근 활동가들이 조직을 떠나야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또 조직을 대표해 정부나 관변단체와 수시로 접촉하는 일부 명망가 중에는 아예 조직을 등지고 정치권에 입문하기도 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시민단체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사기도 한다. 어느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시민운동에 대한 불신 조장과 시민의 참여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유석춘 교수는 “시민단체는 높아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단순히 `진보세력에 대한 흠집내기' 수준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성과 새로운 대안모색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승창 사무처장은 구체적으로 “정보화 사회에 맞는 새로운 운동방식과 지역 중심의 네트워크 건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31 22:55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