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사슴의 죽음

며칠전 이른 아침이었다. 동트기전 운동을 나가시는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우리를 깨우셨다. 누가 집 앞에 죽은 사슴을 버리고 갔으니 아침에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미리 당부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깜짝 놀라 나가보니 말씀하신 대로 집 앞에 사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붉은 피를 흘린 채.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은 기다란 목을 드리운 채 아무렇게나 길에 쓰러져 있어 보는 사람을 더욱 슬프게 했다. 배가 불룩한 걸 보니 새끼를 밴 듯하였다. 아마도 겨우살이 준비를 하느라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밤에 과속으로 달리는 차에 치인 것 같다.

미국의 도로를 가다보면 자주 보이는 것이 야생동물들을 주의하라는 표지판이다. 노란 색 표지판에 자주 출몰하는 동물을 그려놓고 운전자의 주의 및 서행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사슴이고 지역에 따라서는 소나 심지어는 곰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은 시내에서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출퇴근 시간에는 차들이 죽 늘어서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곳이다. 그러니만큼 사슴이나 기타 커다란 야생동물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근처에 있는 조그만 공원에 가면 흐르는 개울을 따라 가끔 사슴이 서너 마리씩 떼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렇게 가끔씩 보이던 사슴이 이제 집 앞에 쓰러져 죽어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었으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사람의 동물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날이 밝자 지나가던 차에서 쓰러져 있는 사슴을 본 사람들은 차를 세우고 내려와 사슴의 상태를 살펴보곤 하였다.

만일 죽지 않고 다쳤다면 관계 기관에 연락하여 치료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신사숙녀의 도움으로 사슴의 장례(?)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환경론자들의 지론은 빌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모여살면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잘 산다는 미국은 자신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자원과 노력을 쏟아붇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군집은 이러한 슬픈 사슴의 죽음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워싱턴 DC 지역은 전통적으로 산업이 없는 도시였다. 공무원과 정치인 및 그들과 공생하는 로비스트와 변호사들이 주된 직종이었던 도시였던 곳이, 정보화 바람을 타면서 인터넷과 무선통신 등 소위 신경제(New Economy)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또 그 사람을 상대로 하는 산업이 일어나 또다시 사람을 모으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가 이야기했듯이 역사상 가장 착한 제국주의자인 미국의 수도이다 보니 갈수록 도시는 팽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워싱턴 DC 주변을 보면 조그만 자투리땅이라도 있으면 나무를 잘라내고 파헤쳐 새로 집을 짓거나 사무실을 짓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리하여 삶의 터를 잃어버린 사슴은 아기를 낳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하러 부지런히 다니다가 슬픈 죽음을 맞이하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반개발주의자들이 이곳 워싱턴 DC 지역에서는 정치적 힘을 얻어가고 있다. 자발적인 시민단체들인 이들은 돈 많은 기업과 부동산 업자의 로비스트들과 힘겹게 싸우면서 사슴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반갑게도 우리나라에서도 무계획한 난개발에 대한 자제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사슴이 돌아올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10/3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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