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도서, 135년 걸린 '귀국'

서울에서 열린 아셈(ASEM) 기간중 김대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반환 문제를 매듭짓기로 합의함으로써 7년여를 지루하게 끌어온 반환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양 정상은 2001년까지 상호 교류와 대여 원칙에 따라 이 문제를 매듭짓기로 하고 외규장각 약탈문서 중 유일본인 어람용 의궤 64책을 포함해 297책을 돌려받고 대신 복본이 있는 다른 의궤를 장기임대 형식으로 교류하기로 했다.

이로써 1993년 고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영구임대 또는 문화재 교류 방식에 의한 외규장각 고서 대여'를 다짐한 이래 표류해온 반환협상은 사실상 종착역에 닿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화재와 맞교환 방식

회담이 타결의 돌파구를 찾은 것은 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린 전문가 3차 회의에서다.

한국측 협상대표인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 원장과 프랑스 대표인 자크 살루아 감사원 최고위원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외규장각 도서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국측에 돌려주는 대신 그에 맞먹는 우리 문화재를 맞교환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당시 협상대표들 사이에 구두로 합의됐던 이 내용은 최근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수용의사를 밝혀옴으로써 양국 정상 간의 합의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양국정상이 `내년 반환'이라고 구체적인 시점까지 명시한 것은 이같은 실무협상에서의 합의에 근거한 것이다.

지난 7년간의 협상과정을 되돌아보면 약탈 문화재의 반환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의 반환요구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은 `무성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1993년 당시 고속철도(TGV) 수주 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우리측 고문서 반환요청에 마지못해 응했던 프랑스는 TGV를 판매한 이후에는 눈에 띄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

국가를 대표해 양국 외무부가 협상 창구가 됐지만 프랑스는 협상하는 시늉만 하며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만 찾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는 협상과정에서 “우리의 반환약속은 `등가의 도서교환' 또는 `같은 조건의 대여방식'을 의미한 것”이라며 외규장각 고문서에 상응하는 가치의 문화재를 제공해줄 것을 일관되게 요구해왔다. 우리측은 세 차례에 걸쳐 교환대상 고서를 제시했으나 프랑스측은 번번히 `가치가 낮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원활한 협상을 위해 지난 해부터 마련된 전문가 회의도 양국을 오가며 1, 2차 회의를 개최했지만 교환 목록은 커녕 대여방식에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이 3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의 파리 정상회담에서 반환협상의 재개를 독촉, 7월 전문가 3차 회의가 열리면서 타결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협상결과가 우리의 국민감정과 큰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해 빼앗아간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의 고문서를 내주면서까지 돌려받아야 하느냐는 억울함 때문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약탈을 공인해주면서 또다른 보물을 내주겠다는 협상결과는 `이중약탈'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의 소유권이 프랑스측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아울러 프랑스의 약탈행위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국제관례, 학계선 `약탈공인' 반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만 그와 비슷한 가치의 우리 문화재가 또다시 해외로 유출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문화 교류' 수준에 불과한 해결 방식은 다른 나라와의 유사한 문화재 반환협상에서도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프랑스측의 등가ㆍ등량 교환 원칙만이 관철된, 협상이랄 것도 없는 협상이라는 반발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약탈 문화재 반환의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프랑스측에 명분을 주면서 우리는 실리를 얻은 것이니 받아들이지 못할 협상결과는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반환 문화재와 반출 문화재의 사료적, 문화재적 가치를 놓고 볼 때 절대로 등가ㆍ등량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힘이 지배하는 국제관계에서 약탈문화재의 반환이라는 원칙론을 주장하는 우리측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계 열강이 강탈해 갔거나 전리품으로 가져간 문화재를 쉽게 내놓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약탈 문화재의 원소유국 반환을 의무화하고 있는 전시 국제법이 있다고는 해도 제대로 적용되는 사례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들로 박물관을 채운 프랑스로서는 반환이라는 나쁜 전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건 당연하다. 약탈문화재 교환은 대체로 상호교환에 의한 무기한 기탁형식이 국제 관례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가 그렇다. 인도 사르나트 박물관이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중인 인도 상아 공예품의 반환을 요구했을 때 상호 영구대여 형식으로 전례를 만들면서 프랑스는 줄곧 이 방식을 고집해왔다.

대포와 군기를 맞교환한 독일 코블렌츠 시청과 프랑스 군사박물관 협정도 같은 경우다. 시모노세키전쟁 때 프랑스군이 노획한 일본 대포를 프랑스측은 일본 갑옷을 받고 2년 단위 시한부 기탁 조건으로 되돌려준 적도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협상의 성격상 맞교환 방식은 프랑스의 입장도 살리고 타협점도 찾는 고육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1월6일 파리에서 열릴 4차 전문가회의에서 보완협상을 통해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지 여부가 기대된다.

이창민 파리특파원

입력시간 2000/11/0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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