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소추안, 정국경색 뇌관으로

올 국정감사는 예년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다. 한빛은행 사건, 동방금고 사건 등 여야 간에 치열한 격돌이 벌어질만한 대형 쟁점이 많았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넘어갔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오히려 국정감사 이후 정국경색의 뇌관이 숨어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이 국정감사 시작 전에 일찌감치 발의했던 박순용 검찰총장과 신승남 대검차장에 대한 탄핵소추안 처리여부가 바로 그것이다.

여야는 벌써부터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탄핵소추안 통과를 위해 이회창 총재가 직접 나서 소속 의원의 결의를 다지는 한편 국감 종료직후 이만섭 국회의장에게 본회의 상정 압력을 넣을 계획이다.

반면 민주당은 법적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야가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회의 상정 자체를 저지한다는 입장이다. 양당 모두 한치도 밀릴 수 없다는 태세다.


대선겨냥, 검찰 견제포석?

한나라당에서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에 대해 강경자세를 추동하고 있는 힘은 다름아닌 이회창 총재다. 이 총재는 기회만 있으면 “이번에 검찰의 위상을 바로 잡겠다”며 벼르고 있다.

지난 10월22일 저녁 열린 총재단 및 당 3역 만찬에서는 직접 폭탄주를 돌리며 탄핵소추안 통과를 위한 결의를 다진 것으로도 전해졌다. 야당으로서 아무래도 부담이 없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이 총재가 `검찰과의 전쟁'을 불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총재의 측근들은 한결같이 “검찰의 중립성에 대한 오랜 불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총재는 1997년 대선 직전 검찰이 김대중 대통령 비자금 사건의 수사를 중지한 것을 시작으로 해 현정부 출범이후 세풍, 총풍사건 등을 겪으며 검찰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총재가 단순히 검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검찰 바로세우기'에 나선 것만은 아닌 듯하다.

궁극적으로는 2002년 대선을 겨냥한 야당의 `검찰 견제용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대선국면에서 검찰의 움직임은 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면서 “2002년 대선에서도 검찰이 이 총재의 주변에 떠도는 온갖 루머를 근거로 수사돌입 여부를 이슈화할 경우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은 대선 분위기가 본격화할 내년 상반기를 앞두고 일찌감치 검찰 길들이기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향후 검찰의 정치적 운신폭을 최대한 제어하려는 사전포석이라는 분석이다.


한나라당 시나리오는 뭔가?

하지만 원내 과반수에 4석 미치지 못하는 133석의 의석만 확보한 한나라당이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이한동 총리의 임명동의안 처리 등 여야 표결대결에서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탈표까지 나오는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탄핵소추안 처리를 위해서도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나라당이 선택할 수 있는 탄핵소추안 처리 카드는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독자적인 힘으로 처리에 나서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소속 의원 133명이 똘똘뭉쳐 당내 결속을 과시하면서 검찰에 `위협구'를 날리자는 속셈이다.

하지만 당내 검찰 출신 의원이 친정인 검찰의 조직에 훼손을 가하는 탄핵안에 대해 못마땅한 분위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는 위험부담이 큰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는 자민련과의 연대를 고려해볼 수 있다. 과반수를 확보, 탄핵안이 통과될 경우 검찰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물론 여권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지도부는 자민련 일부 의원을 상대로 맨투맨식 설득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카드를 선택할 경우 자민련의 숙원과제인 원내교섭단체 관철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다.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될 경우 자칫 차기대선에서 충청권에 대한 자민련 지분을 인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우려도 없지 않다.

더구나 한나라당의 손짓과 더불어 민주당에서도 물밑으로 자민련 껴안기에 나서고 있어 자민련 의원들에 대한 설득이 실제로 표로 나타날지도 미지수다.

따라서 한나라당 일각에선 탄핵소추안 처리에 집착하지 말고 여권과의 막후협상을 제안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조기 레임덕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마당에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의 협조없이는 현 정권이 향후 국정운영을 하기 어려운 처지인 여권과 협상을 통해 검찰총장이나 대검차장중 한 사람만 `희생양'으로 삼거나 자유투표를 실시하는 식으로 처리하자는 생각이다.

물론 이 카드가 성사되려면 이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후반기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약속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처리?

그렇다면 11월8일 이후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처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탄핵소추안 관련 법률 조항은 헌법과 국회법에 나와있다.

헌법 65조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1 이상의 발의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국회법 130조는 “탄핵소추의 발의가 있은 때에는 의장은 즉시 본회의에 보고하고 본회의는 의결로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본회의에 보고된 때로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무기명 표결한다”고 돼있다.

한나라당은 지난달 13일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헌법상의 발의 요건을 갖춘 셈. 이에 따라 법률상으로는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처리해야만 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발의된 탄핵소추안이 정치적으로 해결돼왔다는 것. 법 규정으로는 의장이 즉시 보고토록 돼 있지만 대개 본회의 보고 시점은 여야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왔다.

실례로 1999년 2월4일 제출된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두달여 뒤인 1999년 4월6일 보고돼 24시간이 지난 7일 표결했다. 또 1998년5월의 김태정 전 검찰총장, 1999년 8월의 박순용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여야간 합의를 하지못하는 바람에 보고도 못하고 자동폐기됐다.

따라서 이번 탄핵소추안에 대한 칼자루도 이만섭 국회의장이 쥐고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국회법을 존중해 8일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을 곧바로 보고하느냐, 아니면 여야 합의 도출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보고 시기를 늦추느냐는 온전히 이 의장의 뜻에 달려있는 것.

현재 이 의장은 “법과 순리를 따르겠다”는 입장. 국회의장실 주변에서는 “민주당측에서 아무리 본회의 보고를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고 해도 꼭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아무래도 `즉시 보고' 보다는 `지연 보고' 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여야가 탄핵소추안 처리에 대한 해법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뜸을 들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탄핵소추안도 이미 법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 색깔이 짙게 배여 있기 때문이다.

박천호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07 15:45


박천호 정치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