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부실기업 퇴출] 시장 기대 못미친 '숫자놀음'

부실기업 52개사 발표, "알맹이 없다" 비난

역시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정부와 은행권은 경제 체질을 약화시키는 주범인 부실기업을 과감히 시장에서 퇴출시킨다는 목표 아래 2차 정리대상 기업을 선정, 발표했으나 시장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평가다.

특히 이미 청산절차를 밟고 있는 법정관리 기업이나 자산을 매각하고 이름만 남은 기업을 청산대상 기업으로 선정하는가 하면 팔려고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은 대우그룹 계열사들을 대거 매각및 합병대상 기업에 포함하는 등 `숫자노름'에 불과하다는 악평마저 나오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현대건설과 쌍용양회는 신규대출을 금지하고 유동성 문제가 재발하면 부도처리한 뒤 즉시 법정관리에 편입시키는 `제3의 방식'으로 처리해 오히려 면죄부만 준 꼴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없지 않다.

재정경제원과 금융감독원의 지휘 아래 한빛은행을 비롯한 채권은행단이 11월3일 자체적으로 선정 발표한 정리대상 부실기업은 모두 52개사. 주거래은행이 부실징후가 있는 총 287개를 1(정상), 2(회생가능), 3a(자구계획 전제 회생), 3b(정리) 등 4개 등급으로 분류, 3b등급의 52개 기업을 정리대상 명단에 올렸다. 현대건설과 쌍용양회는 보류판정인 `3-기타' 등급으로 변칙 분류됐다.


변칙 분류 등 결과 미흡

그래서 시장에서 퇴출될 기업 비율은 전체 대상기업의 약 18% 정도. 구체적으로는 간판을 완전히 내리는 청산대상 기업이 18개사, 경영진이 바뀌는 법정관리대상이 11개사 등 퇴출 기업은 모두 29개사이며 대우계열 10개사를 포함한 20개사는 매각대상에 포함됐고 3개사는 합병대상에 들어갔다.

나머지 기업중 정상판정을 받은 1등급은 136개 기업이며 일시적인 유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금융권의 지원으로 생존이 가능한 2등급에는 28개기업이 선정됐다.

또 자금난을 겪고 있으나 사업전망은 있어 자구계획을 전제로, 은행이 책임지고 회생시키는 3a등급에는 69개 기업이 편입됐다.

청산 기업은 삼성그룹의 삼성차(자동차 및 상용차) 한라자원 광은파이낸스 기아인터트레이드 대동주택 미주실업 신화건설 우성건설 피어리스 삼익건설 서광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등이며 대한통운 동아건설 태화쇼핑 청구 해태상사 서한 우방 영남일보 동보건설 등 11개사는 법정관리, 진도 고합 등 20개는 매각, 갑을 갑을방적 등 3개사는 합병대상이다.

11ㆍ3 부실기업 퇴출조치는 1998년 6월에 이어 두번째다. 1차에는 55개 기업이 정리대상으로 올랐으며 현재까지 청산 완료된 기업은 26개사이고 나머지는 매각, 합병, 법정관리 등으로 정리됐다. 10개사 정도는 아직도 법인의 명맥을 잇고 있다. 11ㆍ3 조치가 1차 조치와 가장 큰 차이점은 부실판정 기준.

1차 때는 부채비율 중심의 재무건전성이 가장 중요했으나 이번에는 현금유동성이 기업의 운명을 가르는 최고의 가치기준이였다. 287개 평가대상 기업을 1, 2, 3a, 3b,로 나눈 것도 엄밀히 말하면 `정상, 단순 유동성 위기, 구조적 유동성 위기, 정리기업' 등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한다.


“숫자 채우기에 급급” 비판

이번 조치는 동아그룹을 법정관리에 편입시키는 등 1차 조치와 비교해 질적인 측면에서 나아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도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고리를 끊지는 못했다. 동아그룹의 경우, 11ㆍ3 조치 이전에 이미 시장에서 퇴출됐다는 게 시장반응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건설과 쌍용양회에 대해 결론을 유보하고, 고합과 갑을 등 살아날 가능성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을 회생시키기로 함으로써 `시한폭탄'을 제거하지는 못했다는 지적도 많다. 대기업이래야 삼성상용차 정도가 고작인데 그것도 채권단의 의지라기 보다는 삼성그룹이 상용차를 포기한 데 따른 결정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부실판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가능성은 퇴출대상 기업의 면면을 보면 명확해진다. 청산 혹은 법정관리 대상 기업 29개사중 정상적인 기업은 광은파이낸스 기아인터트레이드 삼성차(자동차 및 상용차) 양영제지 한라자원 해우 등 6개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어떤 형태로든 시장에서 퇴출 혹은 제재를 받은 기업이다. 동아그룹과 영남일보도 법정관리 판정을 받았으나 이미 부도가 난 상태. 또한 삼성차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소기업'이다.

게다가 삼성차와 기아인터트레이드는 각각 르노와 현대에 합병되면서 자산을 처분하고 이름만 남은 `껍데기 기업'이라고 한다. 기업의 법정관리 여부를 판단하는 법원측이 정부의 11ㆍ3 조치에 불만을 나타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조치로 국내 금융권이 덜게 될 잠재부실 규모를 보면 얼마나 부실판정인지 알게 된다. 청산 및 법정관리가 결정된 29개사에 대한 금융권 총 신용공여 규모는 11조4,532억원.

그러나 민간연구기관 등이 2차 기업퇴출을 앞두고 국내 금융권의 잠재부실 규모를 40조-50조원 정도로 추정했던 점에 비춰보면 잠재부실의 현실화 규모는 3분의1에도 못미친다.

여기에 대한통운(5,227억원)과 동아건설(2조8,355억원), 르노에 매각된 삼성차(3조5,000억원)를 빼면 정리될 잠재부실은 겨우 3조-4조에 불과하다. 6조원 안팎으로 추정되는 현대건설 하나를 제대로 정리하는 것보다도 못한 셈이다.


금감위 채권단 한계 드러내

이번 조치의 성패는 역시 고합 갑을 진도 대농 등 회생판정 대기업의 앞날에 달려 있다.

채권단은 조금만 더 지원해주면 살아나거나 매각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채권의 상당액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워크아웃 기업인데 앞으로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면 또한차례의 부실기업퇴출 조치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것은 죽인다' 보다는 `어떻게든 살릴 수 있으면 살린다'에 무게를 둔 이번 판정에 시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워크아웃 기업의 경우 2년 가까이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모두가 자산매각을 추진해왔으나 매각이 성사돼 워크아웃을 벗어나는 기업은 10개중 1개사의 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금감위나 채권단의 한계가 이번 조치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장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부조치가 계속되고 있는 판에 누가 나서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히겠느냐'는 것이다. 시장경제과 원칙에 입각한 경제운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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