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부실기업 퇴출] 벼랑 끝 현대건설, 한시적 회생?

정부 '판정유보', 감자·출자전환 유도추가 자구안에 기대

흐르는 강물도 처음에는 계곡의 빗물이었다.

한국 건설업체의 대표적 간판으로 `중동 붐'을 일으키며 현대그룹을 한국 1위 기업으로 키운 현대건설이 이제는 생사의 갈림길에 접어들게 됐다.

물론 거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가던 현대건설의 부실이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자산을 발판으로 수조원의 부채를 `코끼리 비스킷'으로 여기던 현대건설의 운명이 이제는 `카운트 다운'에 돌입한 것이다.

올해 초 정몽헌(MH) 현대아산이사회회장과 정몽구(MK) 현대자동차회장이 가신그룹 임명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던 것이 불씨를 당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대사태는 `계곡의 빗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계속된 `왕자의 난'과 가신그룹의 반란 등이 이어졌고 5월 31일 3부자 퇴진에 이어 현대자동차 계열분리 등의 과정을 거치며 현대호는 시장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결국은 채권단의 현대건설 차입금 회수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흐르는 강물'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불과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뒤늦은 대책회의, 결과는 신통치 않아

정부의 제2차 퇴출기업 발표가 있었던 3일 오전. 현대건설 안팎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은 `조건부 회생'기업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오너의 자구계획안 제출 등 일정한 `액션'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법정관리도 불사한다는 것이 정부와 채권단의 입장이었다. 특히 현대라는 대형 건물에 `불'이 나있는데도 집주인(MH)은 외유로 일관하며 집을 돌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데 정부와 채권단은 열통이 터지고 있었다.

정부와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현대그룹의 실질적 오너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회장은 2일 저녁 샌프란시스코에서 급거 귀국했다.

정 회장은 12층 회장실에서 기자들의 출입을 막은 채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 등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들은 뒤 곧바로 수뇌부 대책회의를 가졌다.

정 회장 일행은 사옥에서 1시간 여 동안 회의를 가진 뒤 계동 사옥을 빠져나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숙의를 계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김경림 외환은행장 등을 만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그 와중에도 현대 채권은행단 금감위 관계자들은 하나은행 기업어음(CP) 200억원, 대한생명 당좌수표 165억원 등 만기가 돌아온 365억원을 막느라 밤새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금감위는 만기가 돌아온 기업어음과 당좌수표 등을 연장시키기 위해 은행단을 계속 설득했고, 가까스로 고비는 넘겼다.

정 회장은 그러나 이 위원장과 김 행장 등을 실망시켰다. 상황파악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 데다 사재출자 등 획기적인 계획을 들고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3일 오전부터 정부, 채권단으로부터 현대건설에 대한 난기류가 감지되고 있었다. 전날까지 현대건설을 `조건부 회생'으로 가닥을 잡았던 정부와 채권단이 갑자기 태도를 변화시킨 것이다. 정몽헌 회장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조건부 퇴생'서 `유보'로 태도 변화

전날까지만 해도 `회생' 으로 알려졌던 현대건설이 막상 뚜껑을 열자 `퇴출'은 아니지만 `판정유보'가 나왔다. 채권단이 취한 조치의 골자는 이랬다. “은행 차입금의 만기는 연장해주되 신규대출은 없고 진성어음(물대어음), 해외부채 등은 알아서 막으라”는 것이다. 부도를 내겠다는 것인지 살려주겠다는 것인지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일각에서는 `한시적 부도유예' 라는 분석이, 일각에서는 `사실상 법정관리'라는 얘기도 나왔다. 현대건설 직원들은 채권단 발표의 행간을 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쉽게 회생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경부와 금감위에서 나오는 고위 관계자의 현대건설에 대한 언급도 일치되지 않았다.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인지 조율이 안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만 확실했다. 현대건설의 운명을 점치기 어렵게 하는 부분이었다.

우선 7~8일께 열릴 2금융권을 포함한 전체 채권단 회의에 대한 언급이 일치되지 않았다. 정부측은 “2금융권의 만기연장 동의 여부에는 일체 관여치 않을 것”이라며 `법정관리' 시나리오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계속해 왔다.

또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의 발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퇴출기업이 발표된 이후 기자회견에서 “정부도 지쳤다. 별 내용도 없는 자구계획안을 제출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채권금융기관에게 현대건설의 차입금을 연장시켜주라고 독촉하는 것도 이제는 못하겠다”는 푸념이었다.

반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전체 채권단회의에서 만기연장에 합의할 가능성은 90% 이상”이라며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정부측 발언이 `압박성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도유예를 통한 한시적 회생은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지만 진실은 알기 어려웠다.


사재출현, 정씨일가 지원 요구

5일 오후에는 다시 정부의 태도가 변했다. 정부는 현대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의 대외신인도 하락, 하도급업체 연쇄 도산 등 심각한 여파를 우려해 대주주의 동의 아래 법정관리를 피해 감자와 출자전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단 법정관리에 넣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와 관련, 현대건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조만간 정몽헌 회장측에 감자와 출자전환 동의서를 제출토록 요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채권단은 마지막까지 현대건설의 추가자구계획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건설 역시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자구계획을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현대가 할 수 있는 추가자구안의 핵심은 진념 재정경제부장관이 말한 대로 정씨 일가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나머지는 정몽헌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사재출자 등으로 압축된다. 10월 18일 발표한 4차 자구계획안에서 좀 더 진전된 상황이다.

현대건설 채권단에 따르면 현대의 올해 자구계획 목표액은 총 1조6,000억원으로 7,200억원의 자구가 달성됐다. 문제는 남은 8,800억원으로 이중 5,000억원은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고 3,800억원에 대한 이행이 불투명하다.

따라서 현대가 3,800억원의 확실한 자구안을 마련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입장이다.

정몽헌 회장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 정상영 KCC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회장 등과 잇따라 접촉,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들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은 중국으로 `도피'해 버렸다.

현대 계열사와 위성그룹 계열사는 현대건설이 보유중인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아산 등의 비상장 주식과 일부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여유자금을 동원, 현대건설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주는 방안이 유력하다.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아산 주식은 1,600억원 규모에 달한다. 현대건설은 이런 지원 방안과 함께 정몽헌 회장 및 정주영 전명예회장의 사재 출자 1,500억원 등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현대건설의 운명은 아직도 불확실하다. 정부와 채권단이 입장차이를 보이고 채권단내에서도 이견이 많기 때문이다.

조재우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11/07 16:05


조재우 경제부 josus62@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