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시장이 뜨겁다

토종vs수입브랜드, 자존심 건 1위 싸움

태평양이냐 샤넬이냐.

국산과 외제 화장품의 선두주자인 태평양과 샤넬이 1등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판매에서는 30여개 이상의 브랜드로 지난해 7,300억원의 수익을 올린 태평양이 연매출 400억원 대의 샤넬을 월등히 앞서지만 얼마전 20세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된 생산성본부의 고객만족도 조사에서는 샤넬이 태평양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태평양과 샤넬의 선두다툼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두 회사가 국산과 외제 화장품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가히 전쟁이라 불릴 만큼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국산 대 외제 브랜드 간의 경쟁구도와 각기 다른 판매전략을 상징하기 때문.


매출 태평양이 월등, 고객만족도는 샤넬이 1위

1986년부터 면세점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샤넬의 강점은 역시 명품의 이미지다. 주력업종인 샤넬의 패션 제품이 국내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품인데다 창시자인 코코 샤넬과 그가 만든 전설적인 향수 `샤넬 넘버 5'가 주는 고급, 고품격의 이미지도 한몫 한다.

또 제품의 외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모든 용기를 까망, 하양, 금색으로 통일시킨 샤넬의 제품은 소비자에게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샤넬이 화장품에 진출한 것은 1975년. 역사는 길지 않지만 특히 가벼우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질감을 지닌 다채로운 색조 화장품으로 대번에 일류 화장품의 대열에 올랐다.

이번 시즌에도 반짝이는 은색 콤팩트 `뤼미에르 플라틴느'와 볼 터치로도 사용할 수 있는 아이 섀도 `듀오 스펙트랄' 등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제품을 내놓았다. 기초 제품으로는 보습 제품인 `이드라 세럼'과 1999년 내놓은 맞춤형 스킨케어 라인 `프레시지옹'이 인기가 높다.

샤넬의 전략은 한마디로 고급화. 1992년 신세계 백화점 본점을 시작으로 현재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비롯,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마산 등지의 백화점과 쇼핑 센터에 모두 30개에 육박하는 매장을 가지고 있다.

고급스런 이미지를 위해 전문점 판매는 일체 하지 않고 입점할 백화점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정보공개를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신비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연출한다. 샤넬 한국지사인 샤넬 유한회사의 허선주 홍보팀장은 “제품 설명과 회사 및 브랜드 연혁 외에는 매출액 등 일체의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본사의 방침”이라고 말한다.

매장 위치나 크기에 대해서도 본사에서 정해진 일관된 방침을 따르는데 이 때문에 더러 백화점 측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지난 4월에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철수하기까지 했다.


고급화 전략에 기능성제품으로 맞서

이에 맞서는 태평양은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산 화장품'이라는 신토불이 정신과 그에 걸맞는 다양하고 적절한 마케팅으로 국내업체 중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태평양이 “우리의 경쟁 상대는 샤넬”이라고 말할 만큼 자신감을 보이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태평양은 브랜드 별로 판매방식을 차별화했다. 30여개가 넘는 다양한 브랜드 중 고가품인 `헤라'와 `설화수'만 백화점 판매를 하고 `라네즈', `아이오페', `마몽드' 등 나머지는 전문점이나 방문판매에 주력하게 했다. 외제 화장품의 백화점 위주 판매전략을 역으로 이용한 것.

1만3,000여개의 전문점과 1만2,000명에 달하는 `아모레 아줌마' 들은 양적으로는 백화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태평양 마케팅 담당 신윤호 부장은 “전체 화장품 유통망 중 백화점은 8% 밖에 되지 않는다. 외제 화장품이 백화점을 다 장악한다고 해도 우리는 끄떡 없다”고 말한다.

둘째, 태평양은 기능성 제품에 눈을 돌렸다. 외제 화장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초제품 기술이 뛰어난 장점을 살리되 단순히 피부를 보호하는 기존 기초제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피부에 특정 효과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1997년 기능성 화장품으로 처음 출시된 아이오페의 주름 제거 제품 `레티놀 2500'은 그해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뽑혔고 국내 경쟁사는 물론이고 외국 화장품 회사도 서둘러 유사 상품을 내놓게 만들었다.

셋째, 태평양은 다양한 이벤트로 고객관리를 하고 있다. 태평양의 고객관리는 이른바 `경험 마케팅'에 근거한다. 고객들로 하여금 직접 제품 소비를 경험하게 하고, 그 경험을 제품에 대한 소비로 연결시키는 것.

이를 위해 태평양은 명동 한복판에 무인 화장품 코너를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자사 제품을 써볼 수 있게 했고 한방 제품인 설화수 고객에게는 허브 농장 체험을 마련하는 등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외제 꾸준한 성장세로 시장 잠식

`태평양 대 샤넬'로 상징되는 국산 대 외제의 화장품 경쟁은 가히 전쟁이라 불릴 만하다. 1986년 화장품 시장이 개방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화장품 시장의 지속적 성장과 함께 십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만 놓고 보자면 외제의 꾸준한 성장세에 밀려 국산 브랜드들이 한걸음 두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는 형세. `기초는 국산, 색조는 외제'라는 구분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다. 또 국산과 외제를 막론하고 브랜드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그들끼리의 경쟁도 만만치 않다.

화장품협회에 따르면 화장품 시장의 규모는 생산실적으로 기준으로 국산과 외제를 모두 합해 약 4조원 가량.

업체수는 국내 제조사만 150개, 크고 작은 수입상은 350여개에 달한다. 종류별로는 기초제품이 가장 세고 색조제품이 그 다음, 서구 화장품 시장에서는 가장 큰 덩어리인 향수가 제일 떨어진다.

국산 화장품만 있던 1960년대초 1억원에 불과했던 시장은 40년 사이에 40배나 늘었고 그 사이 외제 화장품은 빠르게 국내 시장을 잠식했다.

외제화장품의 시장점유율은 1994년의 13%에서 1996년 25%로 높아졌고 IMF 한파로 잠시 주춤했으나 지난해부터 다시 가파른 성장세로 돌아서 올해는 30%를 넘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0월 현재 외제 화장품의 판매증가율은 평균 30%에 달한다. 국산 화장품의 두배에 이르는 높은 수치다.

특히 외제 화장품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백화점 매장 판매를 고수하고 있어 현재 웬만한 백화점 1층은 외제 화장품들로 뒤덮여 있다시피 하다.

백화점 집계에 의하면 샤넬의 뒤를 이어 랑콤도 1999년 한해만 378억원의 수입을 올렸고 에스테 로더와 크리스찬 디올이 각각 279억원과 278억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롯데 백화점 본점의 상반기 매출 집계에서도 이들 외에 크리니크, 시슬리, 아베다, 시세이도, 비오템 등이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국내 브랜드로는 18억 9,000만원 어치를 판 태평양만이 유일하게 10위 안에 들었고, 국내 브랜드 2위인 LG 생활건강은 6억1,000만원에 불과했다.


'비싸고 좋은 물건' vs 믿을만한 제품

외제 화장품들은 공통적으로 샤넬식의 고급화 전략을 취한다. 깨끗하고 정돈된 백화점 매장에, 친절하고 교양있는 판매원, 고급스러운 용기와 포장, 그리고 국산에 비해 비싼 가격은 외제 화장품을 고급품, 혹은 명품으로 만들어준다.

화장품을 고급 물건으로 인식시킴으로써 소비자로 하여금 `좋은 물건, 믿을만한 물건을 샀다'는 심리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전략이다.

현재 수입 화장품 중에는 60만원 짜리 `클레드포 보테 라크레므'(시세이도)가 최고가이고 이밖에 40만원대의 `시슬리아 아이 앤 립콘투어 크림'(시슬리), 38만원짜리 `리뉴트리티브 인텐시브 리프팅 시리즈'(에스티 로더) 등 브랜드마다 수십만원대의 초고가 제품이 나와있다. 최근 문제가 된 외제 화장품의 12배 폭리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백화점에서 밀려난 국산 화장품은 할인점이 변형, 발전된 전문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웬만하면 10만원대를 넘지않아 외제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믿을만한 제품, 좋은 제품'이라는 신뢰도는 떨어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실제 외제와 국산을 브랜드 없이 비교하면 성능과 품질은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브랜드 이미지”라고 말한다.

이는 외제에 대한 지나친 선호 외에 2~3년 주기로 브랜드를 갈아치우는 국내 화장품 업계의 관행과 과당 할인경쟁에서 만들어낸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평양과 LG 외에 코리아나, 한국화장품, 나드리 등 상위 몇개 업체를 제외하면 국산 화장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더욱 심하다.


브랜드이미지 제고와 기술개발에 힘써야

그러므로 국내 브랜드들이 외제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태평양 신윤호 부장은 “한번 개발하는데 십수억원이 드는 브랜드를 일단 만들었으면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10년을 넘긴 마몽드와 4년 연속 1,000원대의 수익을 기록한 라네즈 외에도 LG의 `라끄베르', `이자녹스', 코리아나의 `엔시아', 한국화장품의 `칼리' 등이 장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 유행을 좇아 마구잡이식으로 제품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한정된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예로는 기초제품 회사로 확실한 이미지를 구축한 중소업체 참존이 꼽힌다.

이와 더불어 꾸준한 투자로 기술 연구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외제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색채 기술에서는 해외인력을 고용하는 등 품질 제고를 위한 노력하는 것도 국산 화장품의 수성에 절대적인 조건이다.

화장품 협회 김성수 차장은 또 “이제 외국화장품 중 들어올만한 것은 다 들어왔다. 앞으로 국산 화장품들이 브랜드 이미지만 튼튼하게 다진다면 더이상의 큰 시장잠식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07 16:19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