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스타열전(35)] 김동연 텔슨전자 사장(下)

"긴장감을 친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반을 굳힌 벤처기업이 대부분 그렇듯이 텔슨전자도 1992년 창업 첫해 1억5,000만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지난해 3,900억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8,000억원대를 바라보는 등 압축성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 30% 안팎의 성장만으로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은 미국의 신경제에 비한다면 텔슨전자의 성적표는 경이적이다.

압축성장의 뒤에는 어떤 그림자가 깔려 있을까. 악전고투의 상흔이다. 김동연 사장의 표현대로라면 “위기과 함께, 어렵게 위기를 넘기면서 쑥쑥 커온” 텔슨전자다.

첫번째 위기는 광역호출기인 왑스(WAPS)의 개발을 끝낸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으로부터 한해 매출(1993년 45억원)보다 무려 4배나 많은 주문(200억원)을 한꺼번에 따냈지만 정부당국이 판매승인을 보류하는 바람에 호출기를 창고에 쌓아놓아야 했다.

바로 현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초췌해진 그가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건강만을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보따리를 하나 내놓고서는 “급한 불부터 끄세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혼할 때 장만한 패물보따리인데 그거 처분해봐야 얼마나 되겠어요. 아내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얼마나 답답했으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는 김 사장의 얼굴에 잠깐 처연한 빛이 스쳤다.

다행히도 몇달 후 판매승인이 나 김 사장은 고비를 넘겼다. 왑스는 호출기 시장을 석권했고 텔슨전자는 단단히 한몫을 잡았다.


IMF 위기 넘기며 공장이전

그로부터 3년 뒤 두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IMF위기였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단말기를 개발한 텔슨전자는 1997년 초부터 450억원을 투자해 청주에 공장을 짓고 있었는데 IMF환란이 터지자 은행과 투자자들이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돈을 돌려달라니 난감할 수 밖에요. 바깥에서는 죽는다고 야단들이었지만 우리는 현금흐름에 큰 문제가 없었고 버틸 만했거든요. 그런데 시설 투자를 못하게 하니 딱하지요."

그런 우여곡절을 겪느라 청주공장은 예정보다 늦은 1999년 7월에야 완공됐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공장을 옮기려면 한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외부의 주문량을 맞출 수 없었다.

김 사장은 번득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청주공장에서 근무할 직원을 모두 서울로 불러올려 구로공장에서 함께 작업을 시켰다. 공장이전 직후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기 위한 현장실습(On the job training)이었다.

"공장이 이전하면 정상가동까지 보통 2개월이 걸리는데 우리는 1주일만에 정상적으로 돌렸다"고 그는 흡족해했다. 그 일은 외국 바이어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미국의 한 바이어와 내기를 했어요. 공장을 이전한다니까 물량을 줄이려고 해요. 그래서 걱정하지 마라. 물량을 제때 맞춰준다며 내기를 걸었죠. 1주일만에 공장을 정상 가동했는데 그걸 못맞췄겠어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 바이어도 깜짝 놀라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람관리도 경영자의 중요한 역할

김 사장은 그 비결을 순간적인 판단력이라고 설명했다.

“순간적으로 판단해 결정을 내리는게 최고경영자의 능력이자 용기지요. 특히 나는 무언가를 결정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직감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느낌이 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중에 꼭 확인해보는 타입이죠. 아주 중요한 습관입니다.”

그가 말하는 직감중에는 사원의 얼굴을 읽는 것도 포함된다. “아침에 마주친 직원의 얼굴을 보면 어떤 색깔이 느껴져요. 물어보면 반드시 무슨 고민이 있죠.

최고경영자가 알아서 고민을 해결해주면 분위기도 살고 일의 효율도 높아지죠. 적어도 사장더러 `언제 놀러 한번 갑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분위기가 돼야 제대로 돌아가는 기업입니다.”

그렇다. 짧지 않는 기업경영에서 역시 어려운 것은 사람관리였다. 김사장은 “이상하게도 회사에서 나쁜 것은 곧바로 옆 사람에게 전염돼요. 그걸 막아주는 게 최고경영자의 역할인데 쉽지는 않지요”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이 돈의 확보다. 기술과 마케팅 능력만 있으면 사업은 잘 굴러갈 줄 알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역시 돈이 중요하더라는 김 사장. 그런 어려움을 후배 벤처세대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올해 3월 텔슨벤처타워를 구입, 벤처인큐베이팅 사업을 펴고 있다.

물론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여름 연구실을 완전히 태워버린 화재다. 미국 출장에서 막 도착한 김 사장이 봉천동 연구소에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갔으나 이미 모든 장비가 소방호수 앞에 힘없이 널부러진 뒤였다. 매출손실만도 무려 550억원에 달했다.

“기업을 하다 보면 항상 리스크가 따라요. 그때마다 꺾이지 않고 디시 일어서는게 벤처정신이지요.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보통신산업에 몸담고 있으면 위험을 자각하는 긴장감을 친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긴장의 끈이 느슨해질 때 꼭 위기는 찾아오는데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작은 벤처기업은 쓰러지지요.”


인프라 구축은 국가의 몫

그러나 모든 위험을 벤처기업 혼자 지고 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게 김 사장의 견해다.

그는 기업운영에 너무나 무책임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가장 불만인 점은 우리나라에는 사업할 수 있는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럴 듯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 있다 해도 사업화하려면 최소한 법률, 회계, 투자 분야의 전문 집단 등 인프라가 구축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문 변호사 한 사람 모시기도 힘들어요.

앞으로는 벤처 하나하나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국가 스스로가 경쟁력을 확보해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한데 그것은 국가의 몫입니다.”

그렇다고 김 사장이 인프라 탓만 하고 있지는 않다. 스스로의 비전 제시에도 뛰어나다. 텔슨전자의 미래는 `비전 2000'에 담겨있다.

핵심은 음성통신 위주사업에서 무선 인터넷 정보 부가단말기인 스마트폰으로 영역을 넓히고 IMT-2000에 참여해 21세기 초일류 종합정보통신업체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또 널리 인재도 키울 계획이다.

내년 6월 국내의 유수 대학과 손잡고 디지털공학ㆍ전자공학ㆍ경영학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0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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