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경제 저격수'로 나선 공인회계사 윤종훈

저격수가 새 탄환을 장전했다. 공인회계사이자 참여연대의 조세팀장으로 알려진 윤종훈(40). 이제는 인터넷 경제전문지 `돈세상'(www.donsesang.com)의 대표 겸 기자다.

“석달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주로 조세나 재벌개혁문제 등 경제에 관련된 비판기사를 올리는 사이튼데, 머리는 아프지만 이제까지 했던 일 중 가장 만족스럽고 적성에도 맞습니다. 이를테면 `저격수 신문'이지요.

저격수는 총알을 많이 쓰진 않아도 한발한발 모두 정확히 목표를 맞춥니다. 매일 기사를 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고민하는 과정조차 쾌감을 느낄만큼 재미있기도 하고,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의 싸움은 모 아니면 도. 10여년째 생업인 공인회계사 업무를 자진폐업한 상태다.

만약의 배수진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걸 건 싸움. 대상엔 성역도 없다. 최근 그가 올린 기사만도 `삼성의 언론장악 깜짝쇼', `국회의원들이 국세청에 나긋나긋한 이유' 등. 이미 1,000여명의 팬을 확보할만큼 신랄한 논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참여연대 활동서 혁혁한 전과 세운 戰士

이미 참여연대 활동을 통해서도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4월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에 참여, 후보들의 납세실적, 경제 부정사범 등을 치밀하게 추적하며 선거개혁무드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했고 최근엔 삼성가 이재용씨의 편법상속 의혹을 제기하는 등 각종 조세관련 비리와 부정을 밝혀낸 참여연대의 실무실세. 새 기로에 선 그의 표정이 사뭇 비장하기만 하다.

“한때 신문이나 경제, 시사지 등에서도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거기에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는 안하면 안했지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는 성미라 글을 쓸 때도 대개의 필자처럼 두리뭉실하게 넘어가질 못하고 누가 나쁜 놈인지. 왜 나쁜 놈인지 정확히 집어서 써버리거든요. 그러니 청탁하는 쪽에선 당연히 꺼려하죠.”

무슨 일이든 `적당히'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고소득 전문직 중 하나인 공인회계사의 자리도 버려둔 채 굳이 험난한 시민운동가의 길로 걸어나온 윤씨. 전사(戰士)기질이 다분히 엿보인다. 언제 어디에 있든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성미가 그의 이력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1961년 인천에서 출생. 장충고 재학시엔 소문난 문제아였다. 서울을 떠나 제주도 감귤농장 잡부로 살겠다며 친구 여섯과 함께 가출, 도착하기도 전 황급히 행방을 뒤쫓은 부모에게 덜미가 잡혀 되돌아온 전력도 있다.

고2때 성적은 학급 56명중 52등.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도 3학년에 들어서였다. 암기 위주의 입시는 차라리 그에게 막판 역전의 호기였다. 다른 수업시간에까지 수학, 영어책만 무섭게 들여다보는 그였지만 말리는 선생님조차 없었다. 얌전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교사들이 안도해할만큼 대단한 말썽꾼이었던 윤씨. 1년만에 성적을 만회, 무난히 대학입시를 통과했다. 1980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극렬운동권으로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시절, 윤씨의 집안엔 육사 출신 친척이 수두룩했다. 집안에선 대노했다. 제적을 당한 뒤부터 그는 사실상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대학때의 전력으로 강제징집을 당해 최전방에서 복무. 제대후 부모님의 지원없이 홀로 떠돌며 처음 고생이란걸 알았다. 먹고 사는 문제도 자신의 몫이었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2년, 택시운전사로 2년을 일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비참하진 않았다. 그 상황속에서도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포부와 열정이 있었다.


대학입학 10년만에 졸업장

1988년에 복학해 입학한지 10년만에 비로소 졸업장을 안았다. 재학중 시위전력 때문에 취업선택의 여지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공인회계사 시험에 응시, 직업을 갖게 됐다.

첫 직장으로 들어간 곳은 S회계법인이었다. 감사부에 배치받아 일했지만 시작한지 채 6달도 지나지 않아 회의가 찾아왔다. 자산 규모 60억원이 넘는 주식회사마다 자체 회계정보의 왜곡을 막기위해 의무적으로 받도록 규정한 것이 공인회계사에 의한 외부감사제도.

그러나 함정이 있었다. 원리원칙대로 감사를 하다보면 피감사자인 상대기업측에서 기피, 아예 공인회계사 자체를 교체하겠다고 나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타협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처지였다.

고민 끝에 직장과 업무를 모두 바꿔버렸다. 두번째로 입사한 곳이 또다른 S회계법인 국제조세부. 국내에 들어온 외국의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가장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주는게 주업무였다. 일 자체는 한결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도 당분간이었다. 그 역시 `남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자괴감 끝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1994년 독립해 따로 사무실을 차렸다. 주로 영세ㆍ중소상인을 대상으로 일을 하며 한동안 수입도 꽤 올렸다. 좀 먹고 살만해졌다 싶었던 것이 1-2년. 그리곤 우연찮게 시민운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따로 발목이 잡혀버렸다.

“정말, 아는게 병입니다. 처음엔 그냥 제가 아는 변호사 한 분이 도와줄 겸 한번 가보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간 정도였어요. 무슨 확고한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은 친목, 반은 일,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찾아간거죠.

그런데 하루하루 그 일을 하다보니 안에선 무심코 지나쳐봤던 문제들이 의외로 바깥에선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가, 아주 여실히 눈에 띄는겁니다. 아예 몰랐으면 그냥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일단 알고 난 이상은 더 얼렁뚱땅 넘어가는게 안되었던겁니다."

1996년부터 참여연대 조세팀에서 활동, 1998년 조세팀장으로 앉고부터는 생업조차 2순위로 밀쳐버렸다.

이왕 뛰어든 일, 시민운동을 좀더 힘있게 끌어올리고 싶었다. 수시로 일만 터졌다하면 만사 제쳐두고 참여연대 사무실로 달려가던 윤씨. 지난 총선때의 낙선운동 때만 해도 한달 보름 이상 회계사 사무실은 비운 채 총선연대 작업에 매달려 종일 서류와 씨름을 했었다.

물론 그만한 성과도 있었다. 낙선운동은 물론 과세특례제도 폐지 등 지금껏 조세팀에서 설정한 매년 주요 과제마다 빗나간 것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 비장의 실탄도 준비돼 있다”

다른 공인회계사나 소위 기득권의 전문가 단체로부터 `배신자'란 소리도 들었다. 한마디로 “동료에게 칼들 들이댄다”는 것이었다. 협박이나 회유도 숱하게 받았다.

“네 배는 철판을 깔았나 두고보자”는 식의 섬뜩한 전화를 비롯, 언젠가는 새벽 너댓시에 가족까지 대동하고 나와 사무실 앞에서 항의소동을 벌이는 의원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힘이 빠지게 하는건 그런 외부의 소란이 아니라 윤씨 내면으로부터의 딜레마였다.

“항상 제 속엔 두사람의 윤종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족의 생활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세상0과 타협이 필요하기도 한 자신, 또하나는 참여연대 조세팀장으로서 절대 내 개인의 안위를 위해 책임을 저버리거나 타협해서는 안되는 자신, 그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진 가족이 무조건 저를 믿고 따라와줬지만 사실 이젠 그것도 한계점에 와있습니다. 나름대로 문제의 대안으로 시작한게 바로 인터넷 신문인데 앞으로 과연 성공할지 어떨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어찌됐든 가족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바깥의 일을 얘기한다는건 어불성설이므로, 만약의 경우 제가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일과 생활 중 꼭 하나만을 택해야하는 순간이 오게된다면….

이제는 더이상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미뤄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년쯤 확실한 입장정리를 할 생각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다시 공인회계사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거란 겁니다. 그건 지나온 길 자체를 부정하는 거니까요.

다행히 이 인터넷 일만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고 싶은 일도, 생활문제도 다 해결되는거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선 최대한 전력을 다 해 볼 뿐입니다."


시민운동에 뛰어들며 생업은 2순위로 밀려

요즘은 하루에도 열두번씩 생각이 바뀐다는 윤씨. “우리 현실에서 좋은 일 하며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건지 뼈저리게 느낀다”고 독백처럼 쏟는다. 더 막막한 생계문제로 고생하던 젊은 시절에도 이만큼 초조해본 적이 없다.

후회를 하는건 아니지만 가끔은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라며 착잡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하루 걸러 한번씩은 옛 친구나 가까운 동료들을 붙들고 술을 마시며 가슴 속의 답답증을 털어보기도 한다.

그렇잖아도 심사가 복잡한 그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건 갈수록 방어벽만 두터워지는 삼성의 변칙상속건이다.

국세청에서 수집했어야 할 정황증거까지 철저하게 모아 명백한 자료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물쩡 처리되는 상황은 그에게 미심쩍은 구석 투성이다.

기대했던 이번 국감에서조차 오히려 “존경하옵는 국세청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운운의 아부성 인사만 터졌을뿐 그토록 주목했던 변칙증여 의혹건은 시늉만 낸 채 지나가버렸다. 예정한 목표는 연내 해결.

두달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못할 것도 없다. “여차 하면 터뜨릴 마지막 비장의 실탄까지 준비돼 있다”며 그는 다시금 예의 저격수 자세로 돌아온다.

“정작 재벌의 부정에 대해선 방치하면서 서민의 탈세 등 조세문제에 대해선 정부가 쥐 잡듯 하는게 현실입니다. 이전엔 아주 적극적이었던 국세청이 왜 최근 들어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아무리 벽이 높아도 어쨌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참여연대 조세팀장을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쪽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것만큼은 끝까지 싸우고 말겁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11/0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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