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는 땅의 편안함을 일깨워주죠"

고려대 산악회, 선인봉 등반의 하루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텐트 안으로 한 사람이 머리를 반쯤 들이민 채 싱긋이 웃고 있었다. “일어나셔야죠.” 송덕종씨였다.

송씨는 고려대 산악회 등반대장이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오리털 침낭에 몸을 묻은 채 누워있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6시30분. 밖은 이미 식사준비와 등반준비로 부산했다. 뒷편으로는 선인봉이 덮어누를듯이 버티고 서있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다보니 식욕이 영 나지를 않는다. 그제서야 어젯밤 과음한 기억이 났다. 고대 산악회는 어젯밤 취재진을 위해 특별히 `산중파티'를 열었다.

어제 취재진이 도봉산의 선인봉 아래 캠프사이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1시간전 먼저 올라왔던 대원들이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스등 주변에 매트리스를 깐 즉석 술자리에는 벌써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번은 고대 산악회 주말산행이다. 매주 주말산행을 `토요일~일요일'이 아닌 `금요일 밤~토요일'으로 하는 이유는 회원들이 일요일에 개인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번 산행에 참가한 산악회 대원은 모두 11명. 재학생이 10명이고 OB(졸업생)회원 1명이다. 광주 과학기술원 대학원생인 OB회원 성원준(91학번)씨는 후배들 덕분에 바위냄새를 한번 맡아볼 요량으로 자정이 다 돼서 올라왔다.

재학생 중 송덕종 대장(96학번ㆍ신문방송학과)과 강문성(96학번ㆍ행정학과)씨는 군제대 후 3학년에 복학한 최고참이다.

후배들은 2학년 3명, 1학년 4명이 참가했다. 이중 99학번 최기순(인문학부)씨와 00학번 정주은(한국동양어문학부)씨는 산악회의 두명 뿐인 여학생. 이번 산행은 내년 3월 제대를 앞두고 외박나온 강민국(97학번ㆍ경제학과) 병장이 참가한 덕분에 더욱 흥겨웠다.

삼겹살이 익어가자 송 대장이 소주병에 숟가락을 끼워 마이크를 만들었다. “강민국, 노래 일발 장전!” 마이크를 받아 든 강 병장이 `산노래'로 한곡을 뽑았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흘러가는 구름이여, 내 갈 길 기약없는 외로운 산사람….” 소주가 담긴 작은 코펠이 이리저리 오가고, 이야기 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혀가면서 밤은 깊어만 갔다. 잠자리에 든 시간은 새벽 2시반.

코펠 바닥을 긁는 숟가락 소리가 잦아들면서 등반준비가 시작됐다. 1학년은 설겆이, 2ㆍ3학년은 등반장비를 챙겼다. 송 대장은 취재진을 포함한 13명을 3팀으로 나눴다. 각각 다른 루트를 등반하되 오후 3시에 다시 캠프사이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취재진이 소속된 팀은 모두 5명. 송 대장과 강민국 병장, 여대원 최기순, 김명원 기자, 그리고 필자였다.


북한산 인수봉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암장

선인봉은 북한산 인수봉과 함께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암장. 암벽에도 길이 있다. 대부분 바위에 자연적으로 나있는 균열(크랙)을 따라 산악인이 개척해놓은 것이다. 높이 300m의 선인봉에 개척돼 있는 등반루트는 20여개.

송 대장은 선인봉 오른쪽 끝부분에 있는 `외벽(外壁)길'을 오늘의 등반루트로 택했다. 등반을 시작한 시간은 7시30분께. 산악회의 주말산행에서 등반시간은 보통 6시에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젯밤 이례적으로 술을 마셔 시간을 늦췄다는게 송 대장의 말이다.

외벽길의 총 등반거리는 약 140m. 송 대장이 안전벨트에 자일 끝을 묶고 선등을 했다. 암벽등반에서 선등은 대개 팀원 중 등반능력이 가장 뛰어난 대원이 맡는다.

추락했을 경우에 대비한 각종 안전장비를 바위 틈과 기존의 볼트, 하켄에 설치하면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많고 기술이 요구된다. `확보'는 최기순씨가 맡았다. 암벽등반에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등자나 후등자가 등반 중 추락했을 때 공중에 매달릴 수 있도록 자일을 잡아주는 것이 `확보'다.

“앵커” 구호와 함께 송 대장이 출발했다. `앵커'는 고대 산악부의 출발신호다. 바위틈에 장비를 두어 개 설치하며 송 대장은 시원스럽게 올라간다. 약 30m 등반 후 송 대장이 “완료”란 구호를 외친다.

첫 구간 등반을 끝내고 후등자를 확보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두번째 등반자는 최기순씨. 그녀는 아직 초보자다. 산악회 입회 후 이번이 3번째 암벽등반이다. 앵커 구호를 소리높여 외친 최기순씨가 올라간다. 김명원 기자가 셔터를 눌러대자 강 병장이 한마디 농담을 던졌다. “밑에서 등반하는 모습을 찍으면 엉덩이 밖에 안나와요.”

1구간이 끝나는 30m 지점에서 5명이 차례로 합류했다. 바위에 박힌 두 개의 볼트에 함께 체중을 싣고 있는 5명은 이제 운명공동체다. 하켄은 바위 틈에 박아 몸을 의지하는 도구고, 볼트는 맨 바위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박는 것이다.

최기순씨는 산이 좋고, 산악회 선후배가 좋아서 산에 다닌다고 한다. 이 말에 강 병장은 “동아리 방을 잘못 찾아오는 바람에 입회하게 됐다”며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2번째 구간 등반 후 50m 허공에서 다시 합류했다. 바위에 긁혀 생채기가 생긴 최기순씨 손에는 피가 나기 시작했다. 다리 각선미를 해친다며 계단을 피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여대생들의 요즘 세태. 최기순씨는 고생길을 자원해 바위를 타는 이유를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그녀는 암벽등반하는 것을 부모님에겐 비밀로 하고 있다. 아신다면 당장 못하게 할 게 분명하다. 다른 대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암벽등반에 매료 “이유 나도 몰라”

다른 루트로 등반하던 산악회 대원이 손을 흔들며 격려를 보내왔다. 3번째 구간은 외벽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 최기선씨가 바위에 매달린 채 1시간 가까이 용을 쓰지만 진척이 없다. 강 병장이 밑에서 이리저리 코치를 하지만 힘이 빠진 최기선씨는 어쩔 줄 모르고 우는 소리를 낸다.

위에서 확보하던 송 대장이 마침내 용단을 내렸다. 최기선씨에게 도로 내려가 2번째 구간에서 대기하라고 큰소리로 명령했다. 한두시간 매달려 고생하는 것은 예사지만 오늘은 취재진이 시간을 절약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자일은 선등자와 후등자를 연결하고 추락시 몸을 허공에 매달아주는 생명선이다. 때문에 자일을 같이 묶어본 파트너간의 우정은 예사롭지 않다. 졸업 후에도 회원들이 산악회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즘 대학교 산악회는 예외없이 신입생 부족으로 고민이다. 등반이 힘든데다 다른 `우아한 레저'가 많아 산악회를 기피한다는 것. 고대 산악회는 다행히 지난해 1, 2학년 학생이 대거 지원한 덕택에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3구간을 돌파하자 송 대장이 바위턱에서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곧이어 올라온 강 병장은 “군복무 때문에 바위실력이 많이 줄었다”며 숨을 헐떡거렸다.

송 대장은 내년부터 후배에게 등반대장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다. 4학년이 되면 매주 주말산행을 할 여유가 없다. 그는 졸업 후에도 후배들과 암벽등반을 계속할 생각이다. 기회가 닿으면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해외 원정등반을 나갈 계획이다.

선인봉으로 불어오는 11월의 바람은 차다. 꽉 졸라맨 등반화 속의 발끝이 고통을 호소했다. 40m 자일 2동을 연결해 두세번 하강하자 마침내 땅의 포근한 촉감이 발끝에 와 닿았다. 정확히 오후 3시. 7시간여 만에 수직의 암벽에서 탈출해 땅으로 귀환했다. 땅과 평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 맛에 암벽등반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07 18:57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