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우리 선조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의 상징인 나랏님, 즉 임금님이 계신 곳, 궁(宮)의 기둥은 둥글었다.

그리고 땅의 상징인 백성의 집 기둥은 모가 난 방형이었다. 백성의 집기둥이 방형이었는가 하면 하늘인 집의 섣가래는 둥글게 하므로써 천원지방의 절묘한 조화를 건축술에 적용하였다.

또 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상의 무덤이 둥글고 땅의 상징인 자식의 제사터 자리는 방형으로 하므로써 천원지방의 원리를 적용해왔다.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宗廟), 서쪽엔 사직단(社稷檀)을 두었으니 이를 두고 `우직좌묘'(右稷左廟)라 했다.

그 가운데 사직단은 어떤 곳일까?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한 땅의 신인 네모난(方型)사직단은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건립한 것으로 국사단(國社檀)과 국직단(國稷檀)의 흔적이 남아있다. 국사단은 국토신, 국직단은 오곡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것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를 둘만큼 나라에서 신성시하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준비하면서 지관을 보내 제일 먼저 잡은 터도 종묘와 사직의 자리였다.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義州)로 피란하면서 제일 먼저 챙겼던 것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왕은 종묘신주를, 세자는 사직신주를 나누어 지니고 다녔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강수량에 관심이 컸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祇雨祭), 비가 계속 내리면 기청제(祇晴祭),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리면 기설제(祇雪祭)를 지내곤 했다. 3-4년에 한번씩 한재(旱災)를 당했으므로 삼국시대 이래 조정과 지방 관청, 그리고 민간인을 막론하고 기우제가 성했다.

나라의 정치가 잘못돼도 천벌(天罰)이라 하여 왕이 스스로 사직단에 나아가 자숙하기도 했고, 5월 모내기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왕 스스로 목욕재개(沐浴齋戒)하고 내방(內房)을 피하며 반찬의 수를 줄이는 한편 기우제를 직접 지내기도 했다.

국가의 안위를 말할 때 흔히들 “사직이 편하다”,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고 조정의 중신을 일러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한 것을 보면 종묘보다 중요한 것이 사직이 아니었나 싶다.

또 탄핵을 받은 중신이 흔히 자기의 청렴결백을 주장할 때 쓰는 말이 “종묘사직을 두고 맹서하옵건데…”이었던 것으로 보아 종묘사직은 그 이상 그 무엇이 없는 `무소불위'의 처소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일까! `사직동팀'이란 별명이 붙은 사직동 소재 경찰청 조사과의 옷로비 사건 축소ㆍ은폐 의혹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위층의 입김에 따라 사직동팀이 개인에 대한 보복성 청부수사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래서 사직동팀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쯤으로 국민에게 아로새겨져 있다. 사직이란 무소불위의 처소 때문일까!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0/11/0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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